어떤 히피펌
과감한 헤어스타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손질을 안 해도 되는 머리카락이 아닌데 손질을 못하니까 언제나 단정하게 유지하려고 했었다. 깔끔해 보이고 싶어서 미용실에 자주 갔고, 남들보다 더 많은 비용을 들여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주 미용실을 찾았음에도 내 헤어스타일은 오히려 미용실에 가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용기 내서 자른 단발머리는 얼굴형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관리가 어려웠다. 곱슬이 심해서 매직스트레이트 펌을 하면서 어깨 아래 가슴 위 정도의 길이를 유지해 왔다. 머리를 예쁘게 묶을 줄도 모르고, 머리를 묶으면 못생겨져서 항상 머리를 풀고 다녔다. 처음부터 포기한 것은 아니었고, 머리 예쁘게 묶는 법이나 예쁘게 말리는 법, 손질하는 법, 컬을 넣는 법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따라 하기가 어려워서 결국 포기했다.
비싼 드라이기를 사도 도무지 스타일링이 손에 익지 않았다. ‘고데기 쉽게 사용하는 법’ 영상을 보고 똑같이 따라 해 보려 샀던 고데기에 화상을 입고, 고데기는 중고로 처분해 버렸다. 스스로 외모를 잘 관리할 자신이 없어 늘 단정하고 무난하게만 다녔다. 그러니 스스로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인생의 무엇 하나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느낀 순간, 답답함이 극에 달하던 어느 날이었는데, 문득 스스로의 의지로 컨트롤할 수 있는 어떤 한 가지가 떠올랐다. 바로 내 머리카락이었다.
인생이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질 않는 것 같은데, 단정한 헤어스타일이 무슨 소용이 있나 싶었다. 단정한 헤어스타일을 10년 넘게 유지했을 때에도, 아무 일도 없었다. 헤어스타일이 단정하다고 해서 일이 잘 풀리는 것도 아니었고, 면접에 합격하는 것도 아니었고, 좋은 배우자를 만난 것도 아니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단정한 헤어스타일을 유지하면서 얻은 것이 없는데, 헤어스타일을 바꿔봤자 뭔 일 나겠나 싶었다. 헤어스타일을 어떻게 바꾸든 내 일상은 그대로일 것이며, 내 연소득, 월소득은 그대로일 것이다. 인생이 나아지길 바라지만, 근력을 기른다거나 체중을 감량하거나 혹독한 자기 관리를 하는 것보다는 그냥 돈 주고 미용실 가서 헤어스타일 바꾸는 것이 훨씬 쉬워 보였다.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그런 일을 해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시기를 지나고 있었는데,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히피펌이었다. 이름부터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용실에 가서 히피펌을 해달라고 했다. 가격은 20만원이 넘었었고, 3시간 이상 걸렸다. 계속 다니던 미용실이었고, 정성스럽게도 펌을 해주셨다. 뜨거운 것을 뒤집어쓰기도 하고 약을 바르기도 하고, 머리도 여러번 감았다. 미용실에서 머리카락이 잡힌 채로 3시간 동안 대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바뀐 헤어스타일이 기대되었다. 앞으로는 히피펌이라는 이름만큼 조금은 자유롭게 일상을 즐기며 살아야겠다고 다짐도 했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일상이지만, 그래도 내 머리카락정도는 컨트롤할 수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히피펌을 하는 것은 좀처럼 변화가 없는 견고한 일상에 큰 일탈처럼 느껴졌고, 반복되는 일상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게 하나쯤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펌 시술 후 거울을 보았는데, 생각보다 평범했다. 히피펌을 한 것이었는데, 그냥 살짝 부스스한 상태가 되었다. 헤어디자이너 선생님은 당황했고, 컬이 안 나왔다고 했다. 히피펌을 하고 나면 새로운 내가 될 줄 알았는데, 현실은 히피펌에 실패한 내가 되었다. 주기적으로 매직펌을 하면서 유지한 단정한 생머리였는데, 3시간 동안의 히피펌 도전 끝에 펌 주기를 놓쳐 매직 스트레이트 펌이 풀린 상태 같은 부스스한 생머리가 되었다. 돈만 내면 머리카락은 내가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오만이었다. 20만원을 내도, 3시간 동안 미용실에서 가만히 머리채가 잡힌 채 앉아있어도, 헤어스타일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웬만해서는 변화의 기미조차 없는 내 인생이 헤어스타일 바꾼다고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헤어스타일을 바꾸는 것도 사실은 쉽지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헤어디자이너 선생님은 펌을 다시 해주신다고 하셨는데, 3시간여의 파마로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히피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인생에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 없다는 생각에 힘이 빠졌다. 펌을 다시 바로 이어서는 못하겠어서 다음날 다시 펌을 해보기로 기약했다. 그리고 다음날 헤어디자이너 선생님은 전날의 실패에 대한 설욕전을 하듯이 심혈을 기울여 히피펌을 해주셨다. 전날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정말 센 컬이 나오도록 아주 섬세하고 강하게 히피펌을 해주셨다. 이렇게 미용실을 연속 이틀 만에 방문한 끝에 결국 나는 히피펌에 성공했다. 컬이 매우 잘 나왔다. 만족스러운 듯한 헤어디자이너선생님의 표정을 보니 나도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히피펌은 잘 나왔는데, 내가 히피펌에 안어울렸다. 히피펌이 잘 어울리는 예쁜 연예인 사진을 보면서 히피펌을 꿈꾸기 전에 거울 속의 내 얼굴을 세심하게 봤어야 했다.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한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너무 어색했다.
어떤 사람들은 히피펌이 관리가 편하다고들 하지만, 머리를 하나로 깔끔하게 묶는 것조차 잘하지 못하는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어서 머리가 젖은 상태로 컬을 유지해 주는 제품을 듬뿍 발라서 모양을 잡는 것은 언제나 실패했다. 히피펌을 한 내 머리카락은 너무 자유분방해서 앞머리의 방향이 제멋대로였고, 히피펌에게 잡아먹힌 인간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게다가 생머리만 유지했던 나에게 히피펌은 큰 변화여서 거울을 볼 때마다 내가 아닌 것 같았다. 평소에도 낯을 가리는 편인데, 이번에는 거울 속의 나에게 낯을 가렸다. 히피펌을 하니 갑자기 싸움을 잘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원래 남의 눈에 띄기 싫어하는 소심한 인간인데, 헤어스타일에서 왠지 싸움을 잘할 것 같은 자유분방함이 뿜어져 나왔다. 예쁜 히피펌이 되도록 손질하는 것은 내 통제 밖의 일이어서 그때부터 나는 히피펌을 한 머리카락에 지배받게 되었다.
히피펌을 하고 출근하니 회사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 해졌는데, 그 반응이 피곤했다. 히피펌을 한 스스로의 모습이 어색해서 거울을 못 보겠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크니까 숨고 싶었다. 세상에 뭔가 단단히 불만이 있거나, 소개팅이나 면접 같은 단정해 보여야 마땅한 모든 만남에서 선택받기를 포기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았다. 컬이 탱글탱글하게 잘 살아나는 날에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메리다와 마법의 숲'의 메리다와 같은 헤어스타일이었고, 컬이 탱글 하게 살아나지 않는 날에는 '해리포터와 마법의 숲'에 나오는 해그리드와 같았다. 어느 쪽도 나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살아있는 생명체 같은 머리카락들은 매일 나에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고, 대부분의 날은 머리카락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였다. 헤어스타일만은 내 의지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이것도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두 번의 히피펌 끝에 히피펌에 성공하긴 했는데, 히피펌이 어울리는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되어 의미는 있었다. 이번이 아마도 내 인생 마지막 히피펌일 것이다. 뭐라도 해본 결과 알게 된 것이기 때문에 이것으로 히피펌을 해 본 의미는 충분하다. 매일매일 다른 모양으로 뻗쳐나가는 머리카락들을 보면서 나는 히피펌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히피펌을 처음하고 회사에 출근했을 때, '갑자기 파마를 하고 나타나면 곧 퇴사를 한다던데.'라는 말도 들어봤고, 팀 회의 때 팀장님이 팀원들 모두가 다 있는 곳에서 '도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길래 헤어스타일을 그렇게 바꾸였냐.'라는 질문도 들어봤다. 한동안은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 모두 내 머리스타일을 보고 눈이 커지며 '어머! 파마했네!'라는 말을 들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말 걸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내심 말 걸기를 바라는 소심한 인간인 나는 히피펌을 한 후로 사람들의 관심을 너무 많이 받은 나머지 더욱 소심해졌는데, 한편으로는 헤어스타일 덕분에 관심을 받아서 조금은 기쁘기도 했다. 어느 날은 청량리 전통시장 화장실에서 만난 어떤 모르는 아주머니가 파마가 너무 잘 나왔다고 해주셨는데, 그날은 파마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었다.
일상의 이벤트라고는 없는 평범한 일상이지만, 관리 못해서 감당 안 되는 히피펌을 하고 난 후 매일 아침마다 나는 히피펌을 한 내 머리카락들과 전투를 치르고 출근을 한다. 그 전투에서 나는 매일같이 져서 대부분의 날은 해그리드가 되고 드물게 운이 좋으면 메리다가 된다. 히피펌을 한 내 모습이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히피펌을 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겠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이 나이에 처음으로 헤어스타일을 과감하게 바꿔본 것인데,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해볼 수 있을까 싶다. 사람들과 이만큼이나 스몰톡을 해본 경험도 처음이었다. 왠지 덜 호구 같아 보이는 것도 맘에 든다.
머리카락은 계속 자랄 것이고, 펌은 언젠가 풀릴 것이다. 그리고 히피펌을 하게 만들었던 답답한 상황들은 시간이 지나면 해소될 것이다. 그렇게 언젠가 내 머리스타일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즈음엔 히피펌을 하고 나서 아침마다 정돈하느라고 고생했던 기억들도 사라져 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또다시 답답한 상황을 못 견디게 되면, 문득 거울 속의 나를 보면서 답답해하다가 내가 유일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은 내 머리카락 밖에 없구나 하면서 또 다시 못생겨지는 지름길인 단발머리나 히피펌을 할 것이다. 그리고 또 거울 속의 나에게 낯을 가리며 역시 안 어울린다는 것을 또다시 깨닫게 되겠지만,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싶어서 조금은 후련해할 것 같다. 히피펌을 하고 난 뒤, 매일같이 내 머리를 정돈하느라 온 신경을 머리카락에 전부 빼앗긴 덕분인지 애초에 머리스타일까지 바꾸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았던 문제가 뭐였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