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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유효기간을 늘리는 일에 대하여

어떤 로또

by 서윤재

일상을 살면서 어떤 반복되는 시기가 있는데, 내 경우에는 특히 로또에 제발 당첨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시기가 바로 심적으로 가장 여유가 없을 때이다. 앞날이 보이지 않고, 갑갑하고, 이 인생 진짜 답이 없다 생각이 들 때 로또 생각이 간절하게 난다. 이 답 없는 인생에 있어 시간도 해결해주지 못할 것 같은 막막함이 들면, 이번 생은 로또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으로 로또를 사고는 했었다. 로또에 돈을 쓸 수 있는 여력이 없는 자에게는 로또를 천원씩 사는 것도 지출이라서, 로또를 자주 사지도 않았다. 그리고 로또밖에 답이 없다면서도 귀한 돈을 로또나 사는 일에 써버리면 죄책감이 든다. 오천원씩이나 로또를 사는 것은 스스로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꼭 천원, 이천원씩만 로또를 사고는 했다. 어느날 일행과 가다가 우연히 로또 1등 당첨 명당을 지나게 되어 로또를 이천원어치 산적이 있는데, 일행은 깜짝 놀라며 로또는 오천원어치가 한 세트라 이천원어치 사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했다.



로또에 인생을 건 것 치고는 소박한 액수로 로또를 구매하지만, 로또는 내 인생 한줄기 빛이요 희망이라서 천원어치 로또를 사더라도 로또를 사는 마음은 절대 가볍고 작지 않다. 비록 천원, 이천원어치 로또를 사도 내 꿈은 로또 1등 당첨이다. 로또 1등에 당첨이 되면 견고하게 겹겹이 쌓인 여러 종류의 대출들을 한번에 갚고 해외여행도 한번 다녀오고, 마흔 살이니까 본가에서 나와 자취를 하고 싶다. 로또 1등이 되었을 때의 꿈이 겨우 본가로부터 나와 독립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나는 살면서 독립과 관련된 기회를 모두 써버렸다. 그래서 전세 보증금 대출도, 월세 보증금 대출도 못 받는 상황에다가 모아놓은 돈이 없어서 보증금을 마련할 수 없다. 나이 마흔에 이렇게까지 돈이 없을 줄은 몰랐는데, 어쨌든 내 상황이 그렇다. 마지막 보루로 자취를 하기 위해 고금리 신용대출을 받을 수 있긴 하지만, 이미 다양한 대출이 겹겹이 차곡차곡 누적되어 있는 상태에서 고금리 신용대출을 받으면 신용불량자가 될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아진다. 지금의 삶이 깡깡한 얼음 위를 걷는 느낌이라면, 고금리 신용대출을 받는 순간부터는 살얼음을 걷는 난이도로 높아지기 때문에 그것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 일상에서는 로또가 인생에 꼭 필요한 필수재가 아닌 사치재라서 로또를 사지 않아도 내 일상은 어떻게든 굴러가겠지만, 로또라는 희망이 없이는 살아갈 수는 없을 것 같다. 로또가 사치재라면 희망도 사치인 것인지, 로또가 아니라면 희망이라고는 찾기 힘든 일상이니까 나는 내 일상에 희망을 조금 보태기 위해 로또를 샀다. 그렇다고 해서 매주 5천원씩 로또를 사는 사치는 부릴 수가 없어서, 아주 소심하게 아주 조금씩 로또를 샀다. 기분이 아주 좋지 않을 때, 너무 우울할 때, 1초만에 우주 먼지가 되어 사라졌으면 좋겠다 싶은 순간들에 로또를 샀는데, 이게 또 신기하게도 기분 좋을 때, 내가 괜찮을 때, 일이 잘 풀릴 때는 로또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로또는 내가 너무 힘든 순간을 버텼다는 증거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로또는 확인하고 나면 곧바로 버릴 때가 많아서 이것조차 아깝기 시작했다. 낙첨이 되어 로또를 버리는 것인데, 돈을 버리는 듯한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로또를 산 후에 당첨여부를 확인하지 않기 시작했다. 돈 내고 산 것인데, 희망유효기간이 겨우 일주일이라니 희망의 유효기간이 짧아도 너무 짧다. 내 피땀눈물 어린 돈으로 산 희망이라면 일주일보다는 길어야 했다. 그래서 로또를 사도 당첨여부를 확인하지 않기 시작했다. 내 희망은 일주일짜리가 아니라 더 길기를 바랐고, 로또를 확인하지 않으면 희망의 유효기간은 지속된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뀔 때까지 희망을 좀 더 지속할 수 있었다. 그래서 로또를 사서 내 출근가방 주머니에 소중히 넣어 다니며 로또 2천원어치 사기 궁상 단계에서 로또 2천원어치 사고 몇 달 뒤에 확인하는 자린고비 단계로 넘어갔다. 출퇴근길에 힘든 순간마다 무너질 것 같은 힘들었던 순간마다 내 가방에는 로또 1등일지도 모르는 로또가 있다고 생각하면 힘이 났다. 비록 지금 한없이 초라하더라도 내 가방 속의 로또는 1등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몇 달간 로또를 넣고 다녔다.



내 로또는 1등이어야만 했다. 그래야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월급을 받아서 온전히 내가 쓰는 감각이 없어진 지는 오래 되었다. 언제나 월급을 받으면 카드값을 내고 나머지는 대출을 갚으면 남는 돈이 없었고, 신용카드를 써서 다음 달에 또 카드값을 내는 식이었다. 월급은 스쳐가는 것이었고, 대출을 갚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여윳돈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내 인생에 대출이 없는 날이 과연 올까 생각하면서 대출을 전부 갚는 것이야말로 인생 최대의 목표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언젠가 내가 갖고 있는 모든 대출을 전부 다 갚고 나서 대출잔액이 모두 사라지면, 그때는 인생을 살아갈 목표가 희미해져서 오히려 허무함에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대출은 경제생활의 전부이다. 로또 1등에 당첨되면 내 모든 대출을 한방에 갚으리라 염원하면서도, 막상 그 대출이 사라지면 내 인생 목표가 사라지는 것 같은 상실감이 들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이것이 내 희망의 실체이다.



로또를 한 장 사서 몇 달 동안 들고 다녔었는데, 아마 중간에 힘든 일이 한번 있었나 보다. 나는 어느새 로또 한 장을 더 사서 로또 두장을 회사용 가방 앞주머니에 넣고 몇 달 동안 그것을 들고 다녔다. 현실에 치일 때마다 나는 사실 1등이 당첨된 로또복권이 있는데, 확인하지 않았을 뿐이라며 버텼다. 확인하지도 않을 로또를 왜 사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확인함과 동시에 낙첨이 돼서 좌절하는 것이 두려웠다. 로또 당첨이라는 그 희박한 확률에 희망을 멋대로 걸어놓고, 낙첨이 되면 그때마다 번번이 무겁게 좌절했다. 그래서 나는 로또를 살 용기도 없었지만, 로또번호를 확인할 용기도 없었다. 로또를 사놓고 확인조차 회피했었다.



그런데 계속된 좌절에 어디까지 더 좌절할 수 있을까 싶을 때나, 하던 일이 어느 방향으로든 매듭이 지어지는 그런 날에는 로또를 확인할 용기가 생겼다. 그 때의 나는 몇 달간 준비하던 자격증 시험에서 시원하게 탈락했고, 시험이 끝나면 소개팅이나 한번 해봐라 해서 나간 5년 만의 소개팅에서 취미가 무엇이냐길래 책을 좋아한다 했더니 '무슨 재미로 살아요?'라는 질문을 받은 날이었다. 소개팅은 망개팅으로 끝났고, 그 소개팅 자리에서 나는 출퇴근 가방에 존재하는 확인하지 않은 로또 두장을 떠올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더 할 수 있는 좌절이 또 있을까 싶은 그 순간에 좌절총량에 법칙에 따라 이 정도 좌절의 양이면 로또는 어쩌면 당첨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미루지 말고 로또를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에 구매했던 로또 2장을 봄의 한가운데에서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 로또를 확인하면, 새로운 로또를 살 때까지 당분간 희망이 없을 텐데, 이 희망이 사라진다는 것이 아깝지만 확인을 해보고 싶었다. 이쯤되면 당첨이 될 때가 된 것이다. 소개팅에서 얼얼한 질문을 몇 개 받으니 뭐가 두려워서 내 가방속의 로또 확인도 못하고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망개팅 한 번에 자존감이 낮아질 대로 낮아진 나는 몇 달간 소중히 가방 주머니에 넣어뒀던 로또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낙첨이어도 좌절하지 않겠을 것이다. 로또일 뿐이다. 좌절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로또를 확인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로또 4등에 당첨되었다.



로또 구매 횟수도 가뭄에 콩 나듯이 적었지만 5등도 가끔은 가뭄에 콩 나듯이 몇 년에 한 번씩 당첨되고는 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4등에 당첨되었다. 나에게도 주어진 적절한 양의 행운이 있었다. 낙첨될 것이 두려워 몇 달간 로또 확인도 못했었는데, 알고 보니 나는 5만원을 출퇴근 가방 주머니에 넣고 다닌 것이었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추첨행사에서 당첨된 적이 없었고, 뭐 하나 운 좋게 쉽게 거저 된 적이 없다. 그냥 죽어라 박박 애쓰면 뭐 하나 될까 말까 하는데, 무려 로또 4등에 당첨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로또 한 장은 5등에 당첨되었다. 출퇴근 가방 주머니에 몇 달간 가지고 있던 로또 두장이 4등과 5등짜리였던 것이다. 이로써 나는 운이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마다 꺼내 쓸 행운의 증거가 생겼다. 드물게 찾아오는 행운이지만, 분명히 나에게도 행운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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