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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전에서 우는 사람 보셨나요

어떤 서울국제도서전

by 서윤재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하지만, 그래도 살다 보면 기적처럼 결이 맞는 친구가 생기곤 한다. 마흔살이 되어서 기적처럼 만난 친구는 나처럼 책을 좋아했고, 언젠가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응원해주었다. 그리고 서울국제도서전 얼리버드 티켓 구매 링크주소를 보내주면서 함께 가자고 제안해주었다. 오랫만에 생긴 친구가, 나처럼 책을 좋아하는데, 서울국제도서전같은 행사를 같이 가자고 한 것이 기뻤다. 2025년 서울국제도서전은 수,목,금,토,일 5일간 진행이 되는데, 수요일은 첫날이라 너무 정신이 없을 것이고, 토, 일은 주말이라 사람이 너무 많을 것이며, 금요일도 사람이 어쨌거나 많을테니 그래도 사람이 많은 것을 피해서 목요일에 가자는 분석적인 제안에 그러겠노라고 했다. 작가를 꿈꾸는 내게 서울국제도서전은 꿈의 현장이었고, 꿈의 성지였기 때문에 나는 성지순례를 꼭 가야만 했다. 책의 기운을 가득 받아 내 글에 담아야만 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 이면에는 회사에서 느끼는 고단함과 회의감이 한몫하고 있었는데, 회사 생활이 고달파서 나는 작가가 되고 싶기도 했다. 서울국제도서전이 다가올수록 회사생활은 혹독하게 힘들었다. 12년차 직장인이라 이정도 연차가 쌓이면 직장생활에 인이 박힐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째 날이 가면 갈수록 힘들어서 회사생활이 이게 맞나 싶었다. 이직을 시도했다가 면접에서 떨어졌는데, 면접때 받은 질문에 대답을 못한 것이 속상해서 힘들어하던 차였다. 다시 태어나도 대답을 못할 것 같은 질문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런 질문에 대답을 하고 이직을 하겠구나 생각하면 내 한계가 여기까지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지난 12년 동안 직장생활에서 어떻게 버텼지만, 여기가 업무적 성장의 한계라는 것을 느껴서 마음이 무너져내릴 만큼 힘들었다. 마흔 살에 회사일 때문에 눈물이 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나이 마흔을 먹고서도 회사 업무가 마음 같지 않으니 눈물이 났다. 그래서 서울국제도서전에 가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차를 쓰면 안되는 바쁜 상황이었는데, 서울국제도서전에 가는 목요일에는 과감하게 연차를 썼다. 왜냐면 서울국제도서전에 가는 날은 나의 날이었다. 이 하루는 온전히 나를 위해 쓰기로 했으니까 회사에 대한 불편한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아침 일찍 일어나 서울국제도서전으로 향했다. 도착해서 미리 얼리버드로 끊어놓은 티켓을 입장권으로 바꾸려고 하는데, 직원이 '이거 어제 표인데요?'라고 하며 이미 날짜가 지나버렸기 때문에 입장할 수 없다고 했다. 티켓은 현장구매를 할 수도 없어서 나는 서울국제도서전이라 입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너무 속이 상했다. 가기로 한 전날의 티켓을 끊어놓고 한달 전부터 목요일에 가겠다고 설렜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전시회의 날짜를 착각해서 티켓 예매를 잘못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그 때의 나는 마음의 여유가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간신히 참아내던 마음에 작은 티켓 예매 실수가 더해져 그 힘든 감정에 휩쓸려 눈물이 났다.



서울국제도서전은 입장을 위한 끝도 없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나는 그 긴 행렬을 바라보며, 친구에게 예매를 잘못해서 미안하다고, 혼자라도 잘 관람하고 오라며 친구를 배웅했다. 기대감에 들떠 입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니, 늘 그 문턱에서 멈춰 서 있던 과거의 기억들이 스쳤다. 대학입학이나 회사 취업, 결혼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통과하는 것을 뒤에서 바라보며, 혹시라도 누가 버린 입장권이 없을까해서 쓰레기통이라도 뒤져볼까, 아니면 누군가 나를 발견해서 데리고 들어가 주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너무 비참하고 쓸쓸하게 느껴졌는데,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단순히 입장권 예매를 잘못한 사람이 아니라, 또다시 인생의 중요한 통과의례를 통과하지 못하는 실패자처럼 느껴졌다.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채, 그 입구에서 부러운 눈으로 남들을 바라보던 과거의 기억들이 겹치면서 눈물이 났다. 2025년 서울국제도서전 입구에서 마흔살쯤 되보이는 여자가 우는 것을 봤다면 아마도 나였을 것이다.



쓸쓸하게 집으로 돌아오면서 서울국제도서전 후기를 찾아보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 찾아보게 되었다. 예매만 제대로 했으면 들어갈 수 있었는데, 티켓 예매를 잘못해서 되돌아온 것이 아쉬웠다. 겨우 서울국제도서전에 입장하지 못한 것 뿐인데, 이직면접에서 떨어진 것과 겹쳐져서 통과 직전까지 갔다가 탈락한 경험들이 떠올라 온몸에 힘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곧바로 집에 와서 잠이 들었고, 그렇게 한숨 자고 일어나니 기분이 조금 나아져서, 내년 서울국제도서전에는 꼭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내년에 가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미련을 못 버리고 계속 후기를 찾아보았다.



자주 참고하는 도서 커뮤니티에도 서울국제도서전 이야기가 가득했다. 굿즈 후기부터 다양한 이야기꽃이 피었는데, 비록 입장도 못하고 돌아왔지만 그래도 서울국제도서전 이야기가 많아서 좋았다. 내년에는 꼭 예매를 잘 해서 올해 못 즐긴 만큼 더 즐기리라 다짐도 했다. 그런데 커뮤니티에 어떤 사람이 서울국제도서전에 갈 수 없으니 표를 양도하겠다는 글이 올라왔다.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 즉시 내가 가겠다고 답변했다. 이미 토요일 오후가 한참 지난 시간대였지만, 서울국제도서전은 오후 7시까지 하니까 바로 가면 볼 수 있을 것이다. 표를 양도받기로 하고 바로 출발했다. 기분이 무척 들떴다. 표를 양도해주신 분은 혹시 본인 확인 때문에 입장이 어려우면 곧바로 전시장이 있는 코엑스로 오시겠다고까지 말씀해주셨다. 큰 인류애를 느꼈다. 요즘의 나는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건넬 힘마저 없었는데, 누군가의 다정한 친절을 받고 나니 내 마음속에서도 서서히 친절을 베풀 여유가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서울국제도서전에 입장할 수 있었다. 입장권을 잘못 끊은 탓에 입구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던 서울국제도서전에 드디어 들어갈 수 있었다. 서울국제도서전 후기에서 보았던 풍경들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책이 가득했다. 사람들의 표정은 행복해보였고, 새 책들이 매대에 가지런히 있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넓은 전시관 안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책이 가득 들어있을 것 같은 큰 가방을 메고 눈을 반짝이면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밌었다. 전시관 구석 바닥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마치 '그래요, 나 책 좋아해요. 오늘 산 책을 지금 당장 읽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아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책을 좋아하는 일은 혼자서 오롯이 즐기는 취미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같은 마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있는 모습을 보니, 독서는 외로운 취미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느낀 또 다른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서울국제도서전에는 여성관람객이 많았는데, 나보다 윗세대의 여성들도 적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도 계속 즐길 수 있는 취미가 있고, 단순히 책을 사고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책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는 행사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혼자 사는 할머니가 되더라도 1년에 한번쯤은 서울국제도서전에 와서 책과 사람들을 구경한다면, 그렇게까지 외롭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독서는 이미 작가와의 연결이기도 하기 때문에 독서가가 겉보기에는 외로워보일지 몰라도 마음 속은 누구보다도 깊이 연결되어 있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같은 책을 읽은 사람들은 서로 통하는 것이 있는데, 어떻게 책이 외로운 취미일 수 있을까. 이번 행사에 오니 앞으로도 계속 책을 좋아해도 괜찮다는 확인을 받은 것 같아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책을 좋아하는 한 외로울래야 외로울 수 없을 것이다. 여전히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직접 내 이야기를 꺼내놓는 것은 어렵겠지만, 내 책 뒤에 숨어서라면 조금은 용기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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