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혼백을 믿게 하는 법

1장 [실명의 존재들]

by 도붕

아름다웠다.


그 순간만큼은 박애의 정신으로 세상을 온정하는 태양마저 저물기 전의 한 줄기 따스함으로 그녀에게 바치는 흠모를 증명하고자 하는 듯했다. 그리고 현담이 사람이 아닌 존재와 대화를 시도해 볼 기회가 생겼다는 다소 낭만적인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평가해 보려 노력하던 와중, 그 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몸은 평안하시옵니까? 초면에 실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사람을 마지막으로 만나본 지가 꽤 오래되어서 말이옵니다."


현담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겉보기에는 사람과 매우 유사했다. 그 말은, 바꿔 말해서 사람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요소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녀의 근처에는 연붉은 안개 같은, 그러나 명확히 형언할 수는 없는 기운이 지속적으로 맴돌고 있었다. 흐릿하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기에는 매우 충분한 정도였다.


현담은 검은 도포의 사내와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결코 흔치 않은 색의 도포를 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사내와 갖은 요소로 타인의 눈길을 끄는 여인. 그 둘이 함께 동반하다간 결코 달갑지 않은 관심을 받는 일이 잦을 것임이 자명했다. 그런 상황을 미연에 막기 위해서는 결국 사람들 앞에서 둘 중 하나가 보이지 않아야만 했을 것이다. 현담은 팔뚝의 큼직한 흉터를 매만졌다. 공포심 따위는 이미 호기심으로 물든 지 오래였다.


"전 무탈합니다. 그 이유는 상인으로써 갖추어야 할 덕망인 인고 덕분이라 해야겠군요."


"상인이라, 무슨 부류의 상인이시지요?"


"저는 삼 상인입니다. 장사가 정직하다 하여 정 삼상이라고도 하는데, 제 진짜 이름은 현담입니다."


"성함이 현담이시군요. 이 몸은 려리라고 하옵니다. 그리고 삼 상인이라니, 삼장사와 괴로움을 참는 것 사이에는 어떤 특별한 관련이 있는지요?"


현담은 뜨겁고 습한 안개를 그대로 들이마시는 것처럼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여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현담은 혼백과 대화하는 법을 몰랐다.


"아, 려리…… 시여. 제가 감히 무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자면, 그런 사적인 이야기는 차차 하는 것이 어떻겠는지요. 지금 저는 당신을 불러낸 분과 급히 나눌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같이 들으셔도 괜찮습니다."


려리는 고개를 갸웃하기는 했지만 현담의 말에 동의했고, 안심한 현담은 다시 사내의 앞에 다가가 앉았다. 려리 또한 그들의 옆에 앉았다. 현담은 혼백이란 앉음이라는 개념을 하체가 녹아내리는 것으로 실현하는 존재임을 깨달은 뒤 말했다.


"저로 하여금 영적 세계의 존재를 깨닫게 해 주심에 감사드리고 싶군요. 또한 저를 간만에 실성의 경지로 이끌어주신 것에도 감사드립니다."


"그대가 저 여인을 만나고도 도망치지 않았으니 나 또한 그 목적을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소."


"그렇다면 이제 말씀해 주시지요."


"현세의 사람들은 영적인 존재를 믿지 않소. 그대와 마찬가지로 말이외다. 그러나 본질적인 관점에서 볼때,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오."


"그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존재조차 확신할 수 없는 것을 믿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사내는 려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허나 그대는 이제 믿게 되었을 거요."


"예, 그렇습니다. 저도 절대 실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던 존재를 두 눈으로 목도하고 나니, 정말이지 믿지 않을 도리가 없군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공께서 그 죽통을 흔들기 전까지는 혼백에 대해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에도 대답할 수 있겠소? 그대가 혼백을 믿게 된 이유는 무엇이오?"


"당연한 일이지요. 그 실체를 직접 보고 나니……, 잠깐, 그렇군요. 말이 그렇게 되는군요? 현세의 사람들도 저처럼 혼백의 실존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을 믿게 되겠지요. 마치 먼 옛날처럼 말입니다. 공께서는 그것을 원하시는 것인지요? 혹 혼백을 풀어놓는다는 이야기도 같은 맥락인 것입니까?"


"그렇소."


"그 이유는 무엇이지요?"


"세인들이 삶만을 긍정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다시 혼백을 되돌려주려 하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혹 내가 누군지 깨닫게 될지도 모르지 않겠소."


현담은 그러한 결론이 어떻게 성립이 가능한지 의문스러웠지만, 상인다운 유연함을 발휘해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남을 나에게 이해시킬 필요는 없다. 나를 남에게 맞추어야 한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런대로 잘 작동하는 기제였다. 그리고 현담은 그 방법에 대하여 질문했다.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다시 혼백을 되돌려준다, 참으로 고혹적이로군요. 그렇다면 그 방법에 대해선 알고 계십니까? 사실 두 눈으로 혼백을 보고도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이 조금 한심하지만…… 애초에 혼백을 해방한다는 것이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요?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입니까?"


"가능하긴 하다만, 현실의 잣대를 들이밀기엔 부적합하오. 이렇게 생각해 보시오. 흐르지 않는 물은 썩기 마련이오. 그러나 흐르지 않는다는 것은 한데 모였다는 것이니, 모으는 것이 가능하다면 풀어놓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겠소? 결코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오. 물론 아직 그대에겐 깊이 와닿지 않을 거요. 차차 알게 될 것이외다."


"유념하지요. 그럼 그것을 위해서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 산맥으로 가야 하오."


"어딘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 어떤 이도 가까이 가지 않는 곳. 하늘마저 비통에 차 흐느끼는 곳. 들어간 이는 살아 나올 수 없는 그곳."


그런 섬뜩한 말들을 열거하면서도 사뭇 건조한 사내의 분위기에 현담은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곳이 대체 어디인지요? 대체 그런 산맥이 세상 어느 곳에……"


"그곳에서 나를 부르고 있소."


현담이 그 말에 의문을 제기하려 했을 때, 그 사내가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그곳에서 나를 부르고 있소. 그곳에서 나를 부르고 있소. 그곳에서 나를 부르고 있소."


검은 도포의 사내는 단 하나의 문장만을 속삭임에 가까운 어조로 끝없이 되뇌고 있었다. 당황한 현담은 옆쪽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고, 그 때문에 가까스로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화들짝 놀라야만 했다.


"려리시여, 무슨 할 말씀이 있으십니까?"


"별 건 아니옵고, 천군의 최후에 대해 아시는지 묻고자 합니다. 이 몸이 저 검은 도포의 사내분께 전해듣자니, 아무래도 의문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온지라."


"천군의 최후라? 저 또한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다 그렇지요. 다만 수상쩍은 점이 몇 개 있다고는 들었습니다."


"그 수상쩍은 점을 알고자 하는 것이옵니다. 공께서는 상인이시니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시겠지요. 그러니 무언가 알고 계시는 것이 있지 않겠사옵니까?"


"예, 물론 말씀하신 대로 제 상회 사람들로부터 전해들은 소문이 있기는 합니다. 다만 그 소문이란 것이 워낙 허무맹랑하여 도통 믿을 수가 없는 것들인지라…… 그래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천군의 자리에는 여덟 개의 탑이 세워져 있다지요? 천군이 멸망할 때, 그 탑이 함께 무너졌다고 합니다. 그 탑의 크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무너뜨릴 만한 작은 크기였겠지요. 그런데 그 무너진 탑들이, 저절로 굴러다니거나 심지어는 스스로 열을 내기까지 한다는 겁니다. 거의 지나가던 개가 웃을 만한 이야기이지요. 또 막상 말씀을 드리고 나니, 솔직히 탑이 무너졌다는 소리도 믿기가 어려워지는군요……."


"일이 그렇게 되었다라, 어쨌거나 그냥 넘어갈 소리는 아닌 듯하옵니다. 하나 크게 심려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군요. 어찌되었건 알려주심에 감사드리겠나이다."


려리는 이내 검은 도포의 사내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현담 또한 걱정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다만 그 대상이 달랐다. 현담은 사내를 향해 뻗어나가는 자신의 왼팔이 너무나도 염려되었다. 저런 괴상한 사내가 무엇인들 못 할까? 하지만 현담이 우려했던, 이를테면 손가락이 손과 갑작스러운 결별을 맞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내가 갑작스럽게 고개를 쳐들었기 때문이다.


그 사내가 일종의 공황 상태에 빠진 것은 잠깐 동안의 일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마치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그 때문에 현담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괜찮으십니까?"


검은 도포의 사내의 시선이 현담에게로 향했다. 그래서 현담은 사내가 자신에게 벌어진 일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여 현담은 사내가 잠시 동어반복증을 앓는 시인 비슷한 흉내를 내었다는 것을 최대한 완곡하게 진술했고, 현담의 설명을 들은 사내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런 일이, 어디까지 이야기했소?"


"어떤 산맥을 이야기하다 말았습니다."


대답한 자는 현담이 아니었다. 사람이 아닌 혼백임에도 사람과 능숙하게 대화할 줄 아는 려리를 보며, 현담은 어쩌면 혼백과 사람의 차이가 미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검은 도포의 사내는 저편의 노을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를 애타게 부르는 이들이 느껴지오. 셀 수도 없는 수의 넋들이 한데 모인 채로, 저편의 머나먼 어딘가에서 말이오. 나는 그곳으로 가서 그들을 해방할 계획이오. 물론 그런 존재들에 얽힌 일이 거의 그렇듯, 순탄치는 않겠지만."


사내는 피다 만 손가락들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현담은 그 손가락들이 어디를 가리키는 건지 몰랐지만, 사내의 말이 더할 나위 없는 진실이라는 점만큼은 알 수 있었다. 현담은 삼 상인이었다. 세상에서 진귀하다고 여겨지는 물건들 중에서도 가장 값진 것들만을 다뤄 온 사람이었다. 진위를 가려내는 면에서는 현담과 비할 자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 산맥의 이름은 알고 계십니까? 이름을 안다면 찾아가기가 쉽겠지요."


"그런 것까지는 알지 못하오. 비단 나 뿐만이 아닌 다른 이들도 매한가지였소. 다만 북동쪽의 어딘가라는 것은 알 것 같소."


사내의 말을 들은 려리가 말했다.


"들어간 이는 살아 나올 수 없고 하늘마저 흐느끼는, 그런 섬뜩한 곳이라면 이름을 모르는 게 마땅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원래 나쁜 것일수록 없애버리려고 하지요. 허나 산맥을 통째로 사장해 버릴 수는 없으니, 아예 이름을 없애버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마 세월이 흐르며 그 산맥은 실명(失名)하게 되었겠지요."


"꽤 타당하게 들리는군요. 려리시여. 통찰력이 대단하시군요."


려리는 현담이 왜 자꾸 자신을 과도하게 높여 부르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려리는 삼 상인이란 다른 상인들보다도 세속적인 경향이 강한 듯하다는 결론을 지었다. 아마 그녀로서는 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현담은 머릿속의 안개가 미약하게나마 걷힌 것을 느끼며 말했다.


"사실 전 상회의 주인으로 세속적인 삶을 사는 것에 오래 전부터 넌덜머리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이 저를 여기로 이끌었지요. 그리고 이제 세상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혼백의 존재를 알고 나니, 이 여행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미련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앞으로의 여정을 통해 어떤 것을 얻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불확실성의 연속일 테니, 말 그대로 모험이겠군요."


"그대는 그렇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으나, 난 그대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소. 또 그대가 알아두었으면 하는 것이 하나 있소만, 우리는 이제 거래의 대상이 아닌 동료요. 그런즉 어느 하나가 위험에 처하더라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오. 분명 쉽지 않은 여정일 테니."


"알겠습니다. 다만 그와는 별개로, 이곳 영원성에선 조속히 뜨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 이유는 후에 말씀드리지요."


사내는 빛을 잃어가는 황혼의 태양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대여, 언제 떠나기를 원하시오?"


"괜찮으시다면 이틀 뒤에 만나 떠남이 어떻겠는지요?"


그 제안에 사내는 말없이 동의했다. 그리고 현담은 성주와의 약속이 있어서 이제 가보아야겠다고 일렀다. 그 말을 들은 려리의 배웅이 끝나자 검은 도포의 사내는 죽통을 흔들었고, 그에 따라 려리의 형체가 서서히 흐려졌다. 현담은 그 잔상을 지우려 노력하며 말했다.


"평안한 밤 되시기를 바라지요."


현담은 그제야 전례 없이 편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되돌릴 수 있었다. '혼백이라는 것이 정말로 있었다니, 저 사내를 만나보기를 잘 했군.' 현담은 이 일은 굳이 발설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결정했다. 현담은 사내와 동행하기로 약속했고 이제 그에게는 여행을 준비하는 일정만이 남아 있었다. 물론 현담이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린 데에는 려리와 사내에 대해 더 알아보고자 하는 의도 또한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때 현담은 가장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잊고 있었던 사실을 하나 떠올렸다.


현담은 그 사내의 이름을 몰랐다. 그는 검은 도포의 사내를 대명사가 아닌 명사로 부를 수 없었다. 하물며 혼백과 사람의 만남에서도 서로의 이름을 소개하는데,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성명을 밝히지 않음은 결코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현담은 왔던 길을 재빨리 되돌아갔고 다시 영원루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날이 어두워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았고, 하여 현담은 무턱대고 문루를 향해 외쳤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가 현담의 부름에 응답했다.


"무슨 일이오."


"아직 계셨군요. 저, 두서없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성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사내는 어둠 속에서 침묵했고, 그래서 현담은 가장 우려하던 상황이 벌어질까 노심초사하며 말했다.


"설마, 기억과 함께 이름도 잊어버리신 것입니까? 정녕 그러합니까?"


"그럴지도 모르겠소."


"하면 저는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


현담이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서도 보다 차분해진 것은, 혼백과의 만남을 통해 현실의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음을 받아들인 덕분일 것이다.


"잊어버린 것과 밝혀지지 않은 것의 차이는 무의미한 것이오."


"…… 대체 당신은 뉘신지요?"


"그 의미를 이미 말하지 않았소? 그대는 나를 불성불명(不姓不名)이라 칭해야 할 것이오."


밤하늘의 만월마저 검은 도포를 자신의 빛으로 물들이지는 못했다. 아마 그곳에서 빛과 어둠 중 어느 쪽의 자리다툼이 있었다면 그것은 분명 도포의 암흑면에 의한 일방적인 잠식일 것이었다. 때문에 현담은 자신이 어쩌면 암흑 그 자체와 대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그리고 그런 부질없는 고민 속에서, 결국 현담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달무리가 짙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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