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부유한 상인과 곤궁한 방랑자

1장 [실명의 존재들]

by 도붕

막사의 안은 조촐했다.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탁자 하나와 의자 세 개가 전부였다. 어둠을 몰아내야 할 호롱불 같은 것은 있지 않았지만, 하늘을 가리는 천막의 빈틈 사이를 헤집고 들어오는 햇빛이 그를 대신해 주었다. 정 삼상은 봇짐을 탁자에 올려놓은 뒤 착석했고, 성주는 그런 그를 한없이 엄숙한 얼굴로 응시하며 반대편에 앉았다.


“오랜만이군. 현담.”


“예, 간만에 뵙는군요. 고송 나리.”


“좀 더 성대하게 베풀고 싶었건만. 그러기엔 자네가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왔어.”


“괜찮습니다. 제가 그런 호사를 좋아하는 부류는 아니잖습니까.”


고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실눈을 뜨고 현담의 옷차림을 관찰했다.


“옷에 흙먼지가 가득하군.”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상인은 없지요.”


짧은 정적이 흘렀다. 제일 먼저 평정심을 잃은 쪽은 성주였다.


막사의 내부가 한순간 호탕한 웃음소리로 가득찼다. 반대로 막사 밖의 군사들이 조용해졌음은 당연한 사실이다. 고송은 이윽고 웃음기를 조금 거둬들인 채로 말했다.


“과연, 과연! 그 입담도 여전하군. 현담! 참말로 오랜만이야. 왜 하필이면 북문을 통해 찾아왔는지는 몰라도, 그 덕분에 곧바로 만나게 되었으니 다행이군.”


“저도 이리 오랜만에 만나 뵈니 기분이 좋습니다. 세상을 피해 은둔하시던 분이 어느새 이런 거성의 주인이 되셨다니, 이젠 고송 성주님이라 불러야 할 듯하군요.”


“그래. 세상이 참 혼란스러웠지. 심향계(心香契)를 이끌던 내가 이곳 영원성의 주인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거야.”


“저도 직접 보니 꽤 놀랍습니다. 성문 기술이 제법 대단하더군요.”


“역시 그렇지? 뭐든지 튼튼한 것이 제일이기 마련이지. 그래서 성을 점령하자마자 성문부터 바꿨다네. 물론 기술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테지만.”


현담은 검지로 탁자를 느긋하게 두드렸다.


“성문을 개조하셨다 이거군요. 그럼 맨 처음에 성을 점령할 때는 아마 수월했겠군요.”


“그래. 심향계원들과 함께 장례 행렬로 위장해 성에 손쉽게 진입했지. 그 뒤는 예상한 대로 간단했어. 그러나 굳이 설명하지는 않아도 되겠지?”


그 말에 그럭저럭 수긍한 현담은 그날 있었던 주객전도의 현장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그 불유쾌한 상상은 광장의 군사들이 왜 그토록 대규모로 훈련하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곧장 이어졌다. 그는 그 목적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로 결정했다.


“밖의 저 군사들은 대단한 정예병인 듯하더군요. 그 목적이 잘 짐작 가지는 않습니다만.”


“정확하게 보았군. 이 성에서 가장 젊고 힘깨나 쓰는 장정들로만 이루어진 정예부대지. 난 저들을 이끌고 인근의 만만한 성들을 점령하려고 해. 심향계원들이 내 지시를 따라 군사들을 잘 이끌어주기만 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꿈이 장대하시군요. 그러나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강인한 군사들이라도 성문을 부수기는 힘들지요.”


"그래, 그건 자네 말이 맞아. 하지만 난 이미 점령할 성마다 첩자를 심어 놓았어. 밖에서 못 연다면 안에서 열면 되지 않겠나?"


"그렇지요. 그렇다면 제가 할 일은 아마 행운을 기원하는 것 밖에는 없겠군요."


현담은 말을 마치며 고송의 눈을 바라보았다. 고송의 의지를 외부에 그대로 드러내는 듯한 눈빛, 그것은 분명 일개 몽상가의 허황된 야심에서 비롯되었다고는 도저히 여길 수 없었다.


그때 군졸 하나가 갑작스럽게 천막을 제치고 들어왔다. 그는 진중한 표정으로 현담과 고송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다급히 고송의 앞에 다가가 섰다.


“성주님, 급히 전해드릴 소식이 생겼습니다.”


“무슨 일인가?”


그 군졸은 자신의 귀를 가볍게 두드려 보였다. 그에 따라 고송이 귀를 가까이 내밀자 은밀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희미한 소곤거림 속에서 현담이 소외감을 느낄 즈음, 고송은 대화를 갑작스럽게 중단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권위적인 것이 아니었다. 웃음을 권위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없다. 하지만 그 군졸은 차라리 그렇게라도 주장하는 게 낫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고송이 이만 나가보라는 말을 하기 전까지 그대로 서 있어야만 했다. 현담은 호쾌한 웃음이 실없는 무언가로 변할 때까지 기다린 후 말했다.


“난데없이 왜 그러시는지요. 저 군졸이 기껏 귓속말로 농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 그래. 자네 혹시 여기 오는 도중에 산적을 만난 적이 있나?”


현담의 눈썹이 미묘하게 경직되었다. 그의 한적한 산행에 더없는 긴장감을 불어넣었던 그 사내. 현담은 이제 자신의 목에 낫지 못할 상처가 새로 새겨지는 것이 아닐지 수심하며 말했다.


“예, 분명히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혹 그자가 지금 절 죽이겠답시고 성문 앞에서 농성을……


그러나 고송의 얄궂은 미소를 본 현담은 그만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진 고송의 대답은 현담으로 하여금 광망한 망상에 빠져들도록 만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산적은 내 부하야.”


현담은 아주 잠시 동안, 고송이 현담의 봇짐 속이 너무나도 궁금한 나머지 수하에게 몹쓸 강도짓을 시킨 것이 아닌가 고민했다. 그러나 늘 그렇듯 그의 이성은 이미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저를 시험하신 겁니까?”


“그렇지. 알아줄 거라 생각했어. 현담, 자네는 한 달에 이 성에 들어오는 자가 몇이나 될 것 같다고 생각하나?”


현담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둘입니다. 이곳에 이로운 이와 해로운 이. 나머지는 셀 필요가 없으니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래, 비슷한 맥락이지. 그래서 나는 이 근방의 산에 내 부하들을 내보내서 산적인 척을 하도록 시켰지. 물론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은 제외하고.”


“그렇군요. 결국 산적의 존재나 소문은 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성에 들어올 자격을 가려내는 '대단히 특별한' 환영 방식이었군요. 어쩐지 그 산적이 하는 짓이 미숙하긴 하더군요.”


“아마 그랬겠지. 내가 그러라고 시켰으니까. 어느 정도의 유연성은 필요한 법이니.”


현담은 자신의 발이 그 불쌍한 부하의 사내구실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떠올렸다. 만약 그 정도라면 어떠한 방식으로든 위안을 건네는 게 마땅했으니, 현담은 봇짐을 뒤적거려 가장 값비싼 물건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현담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이 영원성에 방문한 까닭을 다시금 떠올린 탓이었다. 현담은 깍지 낀 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성주님, 제가 이 성에 어떤 연유로 찾아왔는지 아십니까?"


"내가 자네에게 서신을 보냈잖나."


"물론 그러셨지요. 다만 그 서신이 일반적인 것이었다면, 저 또한 서신만으로 답했을 것입니다. 성주님께선 제가 결코 뿌리치지 못할 내용을 그것의 맨 밑 줄에 적어놓으셨지요. 제게 소개하고픈 사람이 있으시다고."


"그래, 그랬지. 자네가 친히 답장까지 보냈잖나."


"예, 성주님께선 제가 옛날에 말씀드린 목표를 잊지 않으셨던 것이겠지요. 그렇기에 제게 그 서신을 보내셨던 것이고요. 전 성주님께서 지목한 그자를 만나러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제 상회의 실권을 동료에게 반영구적으로 넘겨주면서까지요."


"물론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네만, 만약 자네가 다시 돌아간다면 어떻게 되겠나?"


"제 상회의 운영권을 다시 돌려받겠지요. 그러나 돌아가지 않으면, 운영권은 제 것이 아니게 될 터이지요. 전 돌아간다는 생각은 되도록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이곳까지 찾아왔습니다. 이제 이 이야기를 해봄이 어떻겠는지요."


“허, 그래. 몇 달 전 이 영원성에 특별한 객이 찾아온 적이 있었지. 비 내리던 밤에 은밀하게 찾아와서는……


고송은 말 끝을 흐리며 탁자를 몇 번 거세게 내리쳤다. 그에 따라 탁자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그 두꺼운 철문을 손으로 두드리더군. 문을 열어달라면서. 그래서 열어주었지. 왜인지는 알고 있지?”


“힘들여 찾아온 손을 돌려보내서는 안 되지요.”


“그래. 나도 처음에는 꺼림칙했지만 그래도 그 행색이 범상치 않은지라, 내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끼마다 식사를 제공했지. 또한 그와 몇 번 겸상을 한 적이 있었어. 그럴 때마다 그와 담화를 나누었는데, 어느 날은 그 사내가 내게 이렇게 말하더군.”


현담은 천천히 손등을 문질렀고, 고송은 이어 말했다.


“자신과 함께 이 혼란한 세상에 혼백을 풀어놓을 자를 찾고 싶다고 말일세.”


“놀랍군요. 성주님께서 겨우 이방인 한 명에게 그런 융숭한 대접을 하시다니, 분명 한낱 범부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흠, 예상치 못한 대답이군. 자네는 그게 더 신기한가? 내가 그 사내를 호의적으로 대했다는 것이?"


"성주님. 저는 그런 있지도 않은 거짓말이나 늘어놓는 작자라면, 당장 쫓아내도 모자라다고 생각합니다. 혼백을 풀어놓는다니요? 그런 미신은 애초에, 아니, 성주님께선 대체 왜-"


"셋이야."


"예?"


"자네는 아까, 이 성에 필요한 자는 둘뿐이라고 말했지. 이로운 이와 해로운 이. 그러나 그렇지 않아. 정확히는 그렇게 되어버린 게지. 그 사내까지 포함한다면, 분명 셋이 되고 말아."


"대관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 사내가…… 이롭지도 해롭지도 않다는 겁니까?"


현담의 질문을 들은 고송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이 궁금한가? 그렇다면 직접 가서 만나보도록 해. 백 번 듣는 것보단 한 번 보는 게 낫기 마련이지.”


현담은 산삼 열 궤짝을 무상으로 달라는 말을 들은 듯한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그럴 참이었습니다. 그 혼백을 풀어놓는다는 것이 허무맹랑한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기왕 말씀을 들어보니 그 사내가 어떤 자일지 궁금하기는 하군요. 어디로 가야 하지요?”


“남문 위의 영원루로 가면 그가 있을 거야. 내가 아까 그 군졸에게 미리 말해두었거든. 아마 그도 지금쯤 도착했을 듯싶군. 그럼 난 이제 다시 훈련을 집도하러 가봐야겠어. 현담, 저녁에 다시 보세.”


현담은 불신감이나 배신감이 자신과 고송의 관계에 그다지 유의미한 감정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그저 상황에 맞는 행동을 취했다.


“예, 가보십시오.”


현담은 우렁찬 구령 소리가 몇십 번이나 반복될 때까지 자리에 가만히 앉아 봇짐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귀가 조금 울린다고 생각될 즈음, 조용히 일어나 막사를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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