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철옹성의 문짝

1장 [실명의 존재들]

by 도붕

정 삼상은 흥정에 실패하자 눈이 돌아 닥치는 대로 낫을 휘두르던 사내를 잊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지금 그때의 기억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 것은, 그의 팔뚝에 새겨진 큼지막한 흉터가 불현듯 떠올라서만은 아니었다. 사실 그 이유는 잊힌 칼자국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지독했다.


그의 목에 차디찬 무언가가 닿았기 때문이다.


정 삼상은 그의 뒤를 잡은 것이 들개에게 제 다리를 뜯긴 가련한 송장의 팔일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상상은 하지도 않았다. 또한 뒤이어 그에게 들려온 말은 역시 웃기지도 않았다.


“가진 거 다 내놓으셔. 안 그러면 목을 시원하게 그어줄 것이야.”


정 삼상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산적을 만나다니…… 내 팔자도 참 험하구나. 약탈의 대상이 될 줄이야.’


푸념을 마친 그는 자신의 볼썽사나운 팔자를 마저 탓하는 대신, 제 머리를 잘 보존하기 위해 두 손을 들기를 택했다.


“제 등에 매달린 봇짐이 보이십니까? 그걸 가져가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산적이 칼을 휘둘렀다. 다음 순간 떨어진 것은 그의 머리가 아닌 봇짐 덩어리였다. 매서운 칼날로 봇짐끈을 베어낸 산적이 중얼거렸다.


“어디 뭐가 들어있는지 볼까?”


정 삼상은 비록 자신의 봇짐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서 있긴 했지만, 자신의 소중한 자산이 한낱 산적에게 강탈당하는 것을 방관할 생각은 없었다. 다행히도 그런 그에게 위안을 줄 만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가 서 있는 곳이 멀쩡한 산길이어서, 홀로 줄행랑치기에는 매우 유리한 장소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상인으로서 자신의 짐을 두고 도망을 칠 계획은 없었다.


‘이런 산길 한복판에서 도적질을 하다니, 이자도 그리 숙련된 자는 아닌 듯한데, 하면 기회를 보아야겠구나.’


그 기회는 놀랍도록 빠르게 찾아왔다. 그 가여운 산적이 봇짐 속의 내용물을 보겠답시고 칼을 거둔 것이다.


정 삼상은 냅다 뒤를 돌아 발을 내뻗었다.


“이놈!”


그의 발차기는 정확했다. 그래서 본디 그의 계획대로였다면, 그의 발은 봇짐을 뒤지는 산적의 머리를 가격했을 것이었다. 다만 대다수의 계획이 그렇듯 그의 계획에도 한 가지 변수가 존재했다. 바로 그가 뒤를 도는 것을 본 도적이 급히 허리를 세웠다는 것이었다.


“이, 이보게! 잠시-”


그러나 이미 날아간 발은 멈출 수 없었다. 하여 갈 곳 잃은 그의 발은 그만 도적의 다리 사이로 쏙 들어가고 말았다. 아마 그것은 자신이 요절하고 싶음을 나타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산중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그런 민망한 비명 뒤에 욕설이 메아리쳤다.


"야, 야이 오라질 놈아—!"


정 삼상은 오라질을 받아야 할 자는 자신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말을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그의 고민은 봇짐의 존재 하나로 단순해졌다. 재빠르게 허리를 굽혀 그것을 집어든 그는 곧이어 산적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정 삼상은 무릎 꿇은 산적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산적의 눈은 원망과 고통으로 인해 눈물이 그득그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자의 얼굴은 산속에서 홀로 강도짓을 하는 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박해 보였다. 그에 따라 정 삼상의 미간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산속에서 도적질을 하는 자에겐 어울리지도 않는 얼굴이로구나. 이 자도 전에는 필시 순박한 사람이었으리라.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힘든 삶이 이 자를 산적으로 만들었음이 분명하리……'


정 삼상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앞에 있는 도적의 지난 삶이 선명히 그려지고 있었다. 물론 그가 갑작스럽게 감정에 휩쓸린 것은 아니었고, 그의 상상 또한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을 깨달은 정 삼상은,


곧바로 등을 돌려 달렸다.


정 삼상은 내리막길을 거의 구르다시피 내려갔다. 그런 그의 얼굴은 안도감과 뿌듯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통상적으로, 불가피하게 산을 타게 된 나그네가 기쁨을 느끼는 순간은 단 한 번뿐이라고 알려져 있다.


산길의 종단.


정 삼상 또한 그와 같은 유형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정말 무시무시한 산적을 만났다는 것은 이미 새까맣게 잊어버린 뒤였다. 물론 그의 기억력에 다른 이상이 있어서는 아니다. 그보다는 그가 곧 마주하게 될 존재에 대한 기대감으로 인한 일시적 망각에 가까웠다. 곧이어 흙길의 잔가지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멈추었다.


“아, 저곳이 그 성이로구나.”


간악한 능구렁이의 똬리 같은 산세를 성곽 삼은 천혜의 요새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성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덕분에 설령 천하의 지배자라 하더라도 기가 죽을 듯한 그 웅대한 자연의 조각품 속에서도, 성은 자신의 위용을 홀로 거만하게 과시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가 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발걸음을 재촉하는 일뿐이었다.


정 삼상은 내리쬐는 태양 아래 성을 향해 바삐 걸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이 가진 그 자체의 의미에 감탄했다.


‘북쪽으로는 첩첩산중의 산맥을 몇 겹으로 끼고 있으면서도, 다른 방향으로는 통행이 활발한 모양인데, 그야말로 재물을 끌어모으겠군.'


그런 와중, 저 멀리에서 골똘한 표정으로 걸어오는 정 삼상을 본 수문장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그대는 뉘시오?”


저 멀리에서 이쪽을 주시하던 정 삼상이 답했다.


“정 삼상입니다. 현담이라고 부르지요.”


“아, 정 삼상. 성주님을 뵈러 왔나?”


“그렇습니다.”


들릴 듯 말 듯한 거리에서도 대화는 잘도 이루어졌다. 성의 근처가 황량하여 거의 광장에 가깝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이 조금 아리다고 느낀 수문장은 그가 성문에 거의 다다를 때쯤에야 다시 말을 건네었다.


“현담? 하필이면 북쪽으로 오다니, 사전 조사가 미흡했던 모양이군. 옷은 또 왜 그 모양이야?”


“예. 보시다시피 제 꼴이 말이 아니지요. 길도 험한 데다 오는 도중에 산적도 만났고 하니 뭐, 일이 이리되었습니다.”


정 삼상의 말을 들은 수문장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웃음이 짧게 스쳐 지나갔다. 당연하게도 정 삼상은 그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지기가 당신 한 명뿐이로군요. 원래 이렇습니까?”


수문장은 창을 성벽에 비스듬히 세워둔 뒤 대답했다.


“음, 자네도 보면 알겠지만, 매달 이 북문을 통해서 성에 들어오려는 사람은 정말 몇 되지 않아. 거의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이니까. 나가려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아마 성의 북쪽은 산세가 험해서 그런가 봐. 그래서 뭐, 나 같은 문지기는 할 일이 그리 많지는 않지. 낮에만 잠깐 서 있어도 되니.”


수문장의 말을 들은 정 삼상은 곧바로 두메산골 따위의 이유보다 더 타당한 결론을 도출했다.


“제 생각에는 여기 근처의 산적만 어떻게 정리하면 이 북문까지 닿는 이들의 수가 훨씬 더 늘 듯싶군요. 아마 대부분은 이 성을 보지도 못하고 도망쳐 돌아갈 테니.”


“그렇기야 하겠지. 그래도 다른 문으로 드나드는 사람은 대단히 많으니까, 설령 그렇다 해도 별 상관은 없지. 다만 자네 말을 들으니 지난번에 여기에 온 한 나그네가 생각나기는 하네.”


“무슨 말씀이신지 궁금하군요.”


“음,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지. 그래서 난 이 위의 문루에서 밖을 쳐다보고 있었어. 그런데 성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 밑을 바라보니,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를 웬 나그네가 우두커니 서 있더군. 꺼림칙하긴 했지만 뭐, 찾아온 자는 들여보내는 것이 주인의 도리이니.”


“범상치 않은 일이군요. 우중의 밤에 이런 성을 찾아오다니요.”


“그렇지. 그래서 그자가 성문을 들어설 때 나도 얼굴을 잠깐 보았는데, 정말 그 눈빛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아.”


수문장은 그 순간을 떠올리듯 먼 산을 내다보며 침묵했다. 그래서 정 삼상은 의아스러운 눈으로 수문장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대체 어땠길래 그러십니까?”


그의 질문을 들은 수문장은 눈을 빠르게 몇 번 깜빡였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여기 홀로 서 있다 보면 꽤 적적하기가 이를 데 없는지라. 내가 괜스레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자네 시간만 잡아먹었군. 자네도 이제 그만 성주님을 뵈러 가 봐.”


정 삼상은 어둠 속에서 성문 밖을 어슬렁거리는 남자를 상상해 보았다. 그것은 분명 예사롭지 않은 일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당장 그의 목적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예. 저도 그러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분께선 지금 어디에 계시지요?”


“우선 성문부터 열고 말하지.”


강철이 여러 번 덧대어져 그 두께가 육중하기 그지없는 성문은 한 개인의 각고한 두드림 따위는 가볍게 무시할 듯했다. 그래서 수문장은 늘 그래왔듯 가장 효과적이고 신속한 방법을 사용했다. 성문 위의 문루를 향해 소리친 것이다.


“개문하라! 오래간만의 손님이다!”


성문은 냉담했다. 메질의 흉터와도 같은 단조 자국이 그 표면을 가득 메웠고, 그 사이로는 기이한 쇳소리만이 작게 울릴 뿐이었다. 그 소리는 갈수록 묵직하게 신음하더니 이윽고 단 한 번의 마찰음으로 터져 나왔다.


으드드드득.


그 소리는 분명 철옹성의 문짝만이 토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 상황에 직면한 정 삼상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그 소리를 비평하는 일뿐이었다.


“이것이 그 당김대로 움직인다는 철문이로군요.”


그의 말에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은 수문장뿐만이 아니었다. 성문 또한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대다수의 말 못 하는 존재들이 그렇듯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성문의 정가운데가 서서히 둘로 나뉘었다.


정 삼상은 그제야 성의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는 성문이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성 내부의 광경은 빼곡히 들어선 민가와 그 사이를 가르는 거리들이 즐비한, 지극히 평범한 모습일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외부와 거의 단절된 상태의 읍성은 그 내부 또한 가히 이질적이라 할 만했다.


성문이 조심스럽게 드러낸 제 안쪽에는 민가는커녕 장승이나 솟대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런 것들이 있기는 했다. 다만 그런 것들보다 더 앞에 놓인 광활한 광장, 그곳에 있는 군사들의 질서정연함에 가려진 것이었다.


보편적으로 성의 안쪽에 거대한 광장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도 그럴 것이 주거지 확보나 적극적인 방어의 목적으로는 몹시 불리하기 때문이다. 성주의 취향이 유별난 경우에는 광장에서 군사훈련을 벌이기도 하지만, 오직 군졸들의 훈련을 위한 공간인 데다가 성문이 열리자마자 눈앞에 펼쳐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래서 정 삼상이 마주하고 있는 것은 그 다양한 광장의 종류 중에서도 가장 드문 것이었다.


“저기 붉은 옷 입고 단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 보이나? 저분이 바로 성주이시네.”


“아, 저기 계시는군요. 알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정 삼상은 수문장에게 작별을 고한 후 성주에게로 향했다. 톱니가 맞물리며 성문이 닫히는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보다는 기합 소리의 뒤를 잇는 금속음이 더욱 선명했다.


광장의 흙바닥은 군사들의 땀에 버무려져 습토에 가깝게 변질되어 있었다. 성주의 구령 아래 이어지는 창과 방패의 공방. 수백의 발바닥이 땅을 짓밟을 때마다 피어오르는 매캐하고 끈적한 흙내. 그리고 그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일사불란한 군사들.


실로 장엄한 연마의 현장이었다.


그 풍경에 너무도 몰입한 나머지, 정 삼상은 자신이 그 현장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변칙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단 위의 성주와 눈을 정통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비록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덕분에 군사들은 의외의 휴식을 누릴 수 있게 되었고, 성주는 정 삼상을 광장 근처의 막사로 데리고 들어갔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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