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실명의 존재들]
얼은 물과 같다.
—어느 군자의 유언
메마른 벌판에도 밤은 찾아왔다. 밤중에 울어야 할 풀벌레 소리를 대신하는 것은 오직 잉걸불이 목재를 갉아먹는 소리뿐이었다. 그만큼 드넓은 대지 위에 너즈러지게 솟은 수목들은 한없이 고요했다. 이에 자신 앞에서 고요히 꺼져가는 모닥불을 보며 보부상은 적적함을 느꼈다. 어쩌면 근처의 사막에서부터 불어온 모래바람이 그의 향수를 자극했거나 도적떼에게 동료들을 모조리 잃었다는 상실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차디찬 모래바람이 옛 추억을 상기시켜 주기를 기대한다면 눈만 따가워질 뿐이다. 그래서 그는 덧없는 바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동료들을 추억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럴 심정도 아니었다.
그는 땔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미 적당한 크기로 잘려 있었기에 별다른 가공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것이 어디서 굴러들어 왔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보부상은 자신과 땔감을 동일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공통점을 찾는 것은 그에게 아무런 위안도 주지 못했다. 그는 그 근본도 없는 장작을 잠시 살펴보다가 불 속에 던져 넣었다. 졸지에 마른 틈 사이사이로 불꽃이 스며들게 된 땔감은 비명을 질렀다. 물론 그것은 황야의 고요함에서 비롯된 증폭의 결과일 뿐이다.
모닥불이 다시 환하게 타오르자 그는 약간의 따스함을 느꼈다. 그는 그 행위를 몇 번 더 반복하고 나서야 만족할 수 있었다. 불길이 그의 키보다 높아지고 불꽃을 사방팔방으로 튀기자 그는 뒤로 조금 물러난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는 불의 형태는 그의 두 눈을 심히도 혼란스럽게 했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난 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불규칙한 화염의 춤 속에서 미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불길의 너머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이한 일이었다. 그곳에서 가장 동적인 존재는 분명 장작불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여명이 남은 장작의 개수로 이미 결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타올랐다. 그러나 보부상은 저 멀리의 어둠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질감이 공포심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보부상은 황야에서 움직이는 존재는 비단 장작불만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혹여 사자나 표범 같은 맹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무기로 쓸 만한 것을 찾았지만 마땅찮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저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다. 상식적으로 정신 나간 짐승이 아니고서야 불을 사용하는 인간에게 가까이 접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저것은 사람이거나 그 비슷한 존재임이 분명하다. 만약 정말로 사람이라면 도움을 청해볼 요량으로 그는 가련한 표정을 짓는 법을 홀로 수차례 연습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예상이 적중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무언가의 형체가 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그가 남에게 최대한 애처롭게 보이는 법을 막 터득했을 즈음이었다. 그것은 네 발로 걷는 보통의 들짐승들보다 키가 몇 척은 더 컸다. 그 사실은 곧 그 존재가 두 발로 서 걷는 인간임을 의미했다. 보부상은 사람 하나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사실 그가 느꼈던 감정은 거의 신비함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형체의 걸음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연했다. 먼 거리를 걸어온 자의 피로함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이내 그 존재를 가득 뒤덮었던 어둠에게도 불의 일렁임이 닿자 보부상은 그가 그토록 고대하던 이의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내 한 명. 사내는 보부상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 탓인지는 몰라도 보부상은 그 행색이 이상하리만치 낯설다고 생각했다. 보부상은 잠시 망설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뉘신지요?"
침묵 속에서, 보부상은 저 사내가 무엇 때문에 저리도 이질적으로 보이는지 알아내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보부상은 그 까닭을 어설프게나마 추론할 수 있었다. 사내가 걸친 옷은 도포였다. 그런 그의 상반신까지만 본다면 영락없는 귀인일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스스로가 고귀한 혈통임을 증빙할 만한 어떠한 장신구도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한 번도 자르지 않은 듯한 기다란 머리카락이 등허리를 따라 사납게 풀어헤쳐져 있어, 그 모습이 마치 객사한 귀신과 같았다. 그러나 정작 그런 것보다도 그를 돋보이게 하는 요소는 따로 있었다.
그의 도포는 새카맣게 검었다.
일반적으로 도포는 검은색이 아닌 밝은 계열의 색상이다. 그러나 그 남자의 도포는 검었다. 그것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는 데에는 유리할지 몰라도, 타인의 시선을 피하기에는 불리하다. 아마도 그는 주변과의 독립성을 추구하거나 혹은 그런 사실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성격인 듯했다. 사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홀로 남은 여행자에게 해석의 여지가 퍽이나 다양할 말을 꺼냈다.
"지금 그대에겐 검이 없는 듯하오."
"그 말을 하는 의도가 뭡니까?"
사내는 보부상에게서 조금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보부상은 이 정도 거리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반쯤 타다 만 장작을 재빨리 집어들었다.
"만약 날 위협하는 거라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가까이 다가오지 마십시오."
보부상은 장작을 앞으로 내밀었고, 곧이어 자신의 꼴이 불장난하는 어린애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절망했다. '젠장맞을, 횃불로 결투에서 이겼단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잽싸게 도망이라도 쳐야 하나?' 그러나 점차 사그라드는 불과 달리 고개를 들어 올린 사내는 모든 것들에 아무런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처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불빛을 보았소. 다만 내가 이곳에 온 까닭은 그대를 해치기 위함이 아니오."
"…… 그렇다면 뭡니까?"
"묻고자 하는 것이 있소. 천군을 알현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오?"
"방금 천군이라 하셨습니까?"
"그렇소만."
보부상은 사내의 말에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 실없는 대화에서 보부상은 침묵을 원했다. 그러나 상황을 진전시키는 데 있어 어느 쪽이 더 도움이 될지는 분명했다. 결국 그는 입을 열었다.
"천군이라니요? 천군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천군을 인정하는 자는 있어도 믿는 자는 없다더니, 결국 불 속에서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녹아내렸다지요……. 어찌되었든, 저 같은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신경 쓸 일도 아닙니다."
보부상은 비록 잠깐 동안이었지만 사내와의 조우에서 비롯된 두려움을 잊을 수 있었다. 그 사실에 그럭저럭 만족하던 그는 곧이어 의문점 하나를 찾아내었다. '저 남자는 왜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모르는 거지?' 그가 천군의 멸망에 대한 소식을 들은 것은 몇 개월 전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발 없는 말은 발 있는 말보다 빠르다. 그런즉 저 남자가 사람이라면 이 소식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사내가 풍기는 분위기를 차치하더라도 보부상은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혹시 사람이 아닌 건 아닐까?' 보부상은 보다 완곡하게 돌려 말하기로 했다.
"지금 세간에는 이 소식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모르시는 겁니까?"
"그대 말이 맞소. 세월 앞에서 영원함을 논하는 것은, 아마 부질없는 짓이겠지."
사내는 고개를 옆으로 약간 기울였다. 그리고 보부상이 인간의 신체 구조의 적합성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 적합성이라는 것이 어떤 종류인가 하면 검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부상은 사내의 말에 대꾸하려 했으나 그의 두 눈은 그러기를 원치 않았다. 곧이어 그 또한 그러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의심하고 부정하면서도 똑바로 마주보았다. 때마침 불어온 건조한 모래바람이 사내의 도포자락을 거세게 뒤흔들었다. 보부상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에 온몸을 경련했다. 단순히 바람이 실어나른 서늘함 때문은 아니었다. 사내의 목에는 장신구로서도, 도구로서도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가 꽂혀 있었다. 그것은 단검이었다.
보부상은 냉정한 성격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비명을 질렀다간 자신 또한 같은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그의 침착함을 일깨웠다. '저 상태로 어떻게 여기까지 걸어왔으며, 대체 왜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 거지?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그렇다면 정말…… 사람이 아닌 것인가?'
검은 도포의 사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보부상의 처절한 부름을 들을 수 있었다. 그제야 사내는 세상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런 그의 두 눈에서는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눈을 감기 전부터 그랬던 것이었지만 차이점은 단지 정도의 변화였다. 이제 그의 눈빛은 마치 별을 담아 둔 것처럼 선명하고 날카로웠다. 보부상은 감히 그 눈빛을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보부상은 그의 기준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행위를 곧장 실행했다.
사내는 보부상을 보았다. 이전과는 달랐다. 그는 보부상의 몸짓을 보고 있었다. 사내는 보부상이 도움을 청하거나 자비를 구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보부상은 손으로 특정한 신체 부위를 필사적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목으로 손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