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죽통 속의 미녀

1장 [실명의 존재들]

by 도붕

현담은 문루 안에 들어서면서도 지나가던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성의 구조에 대해 물어보지 않은 것을 후회해야만 했다. 그만큼 성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한 명의 인간에게는 사치스러울 정도로 방대하고 복잡하고 분주했다. 그런 성을 개념적으로 정의하려면 오직 영원함만이 필요할 것이다.


맨 처음 그 위에 올라서서 세상의 지배자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을 누군가에 의해 영원루라는 이름이 붙여진 그 문루의 처마 끝에는, 작은 풍경만이 매달려 지나가는 바람에게 자신의 단출하고도 청아한 아름다움을 알아달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텅 빈 속에 달려 있는, 조그마한, 구렁이 신수(神獸) 장식의 쇳조각. 비록 이제는 그 의미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껍데기만은 홀로 남아 공명하며 과거의 풍습을 파편적으로나마 증언한다. 그러나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은 그런 사실에 연민을 느낄 필요도, 의무도 없다.


길거리의 걸인에게 따듯한 음식과 깨끗한 옷을 제공한다고 해서 그것이 걸인의 보은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보다 염세적인 이들은 차라리 걸인이 집주인의 금붙이가 탐이 난 나머지 그자를 죽여버리는 것이 더욱 현실적인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래서 세인들에게는 숭배라는 개념 또한 그와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미 잊힌 옛 전설, 과거의 잔재, 말도 안 되는, 해묵은 옛이야기.


신수 숭배, 단 네 글자에 붙는 과도한 수식어들.


현담 또한 줄곧 그렇게 생각해 왔다. 굳센 바람에 한껏 신비로운 향취를 더하는 풍경의 울림 또한 그런 현담의 마음에 별다른 변화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그에게는 어디까지나 신화는 신화고 삶은 삶이었다. 현담은 자신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결코 말도 안 되는 미신을 신봉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굳건히 확신했다. 그래서 그 사내를 만날 때까지도 그의 신념은 그런대로 확고한 상태였다. 하지만 때때로 현실은 현담에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괴리감을 요구했다. 바로 지금 그가 당면한 상황이 그러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리셨다고요? 유감이지만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삼 상인이지 마음의 병을 고치는 의원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아 상실을 고칠 수 있는 정도의 의술을 가진 의원이 과연 있는지도 의문이군요."


"헛소리가 아니외다."


현담은 자신 앞의 저 검은 도포의 사내, 그 존재를 자신에게 어떻게 납득시켜야 할지 당최 감도 잡히지 않았다. 현담은 마음속을 단 하나의 단어로 가득 메운 뒤 말했다.


"그러니까, 정말로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리셨다는 겁니까?"


"그렇소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보통 그런 일은 머리를 크게 다친 이에게만 일어나는 일인데, 그마저도 그리 극단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머리를 다친 적도 없으시다고 했지요. 혹 머리를 다친 기억도 사라진 것은 아닌지요?"


"내 머리에는 아무런 흉터가 없소."


현담은 저 남자의 기다란 장발머리가 어쩌면 충격 완충 작용을 훌륭하게 수행한 것은 아닐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현담의 마음속에 가득 들어찬 평정심은 그를 다시 온전한 현실 속으로 데려다 놓았다.


"그렇다면 뛰어난 의술을 가진 의원을 만나보실 계획은 없으십니까? 제가 운영하는 상회는 그 명성만큼이나 인맥도 뛰어납니다. 내로라하는 의원쯤은 손쉽게 모실 수 있지요."


"그대가 조금 전에, 잊어버린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의원이 있는지 의문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모든 인력을 동원해서라도 천 년 묵은 산삼을 구하면…… 아닙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이 과연 있기는 한 것일까요."


"물론 있기는 하네만, 그것에 그대가 동의해 줄지는 잘 모르겠소이다."


"혼백을 풀어놓는 것 말입니까?"


"성주에게 들었겠구려."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문루 한가운데서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저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기 위해 이곳까지 왔습니다. 비유적인 표현일 것이라고 짐작됩니다만."


현담은 자신의 어투가 마치 대단한 모험이라도 마치고 돌아온 자의 것처럼 들린다는 것을 깨닫고는 약간의 처연함을 느꼈다. 현담은 자세를 조금 고쳐 앉은 다음 이어서 말했다.


"그래도 공께 직접 들어보고 싶군요."


"성주와는 친분이 두터우시오?"


현담은 그 목적이 고작 타인의 인간관계를 탐구하고자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예, 길게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저의 은인과도 같으신 분입니다."


"난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오?"


"……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동안 무척 신세를 졌소. 고맙게 되었소."


그쯤 되자 현담은 자신이 사실 고송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도무지 저버릴 수가 없게 되었다. '감사 인사는 보통 은혜를 베푼 이에게 하는 것이 아니었나?' 현담은 저 사내가 기억력뿐만 아니라 언어 인지 능력에도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었다. 그만큼 그 사내의 말은 극도로 궤변스럽고 생략된 것이었다.


"난세라는 염세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깊게 생각해 본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곳이 그런 주제로 담화를 나누기에는 그리 적합한 곳도 아닌 듯하군요. 그보다는 좀 더 개인적인 이야기에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제 그 '목적'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지요."


사실 현담의 말에도 생략된 단어가 몇 개쯤 있었다. 그 단어들은 모두 동일했다. 제발! 제발! 오직 그뿐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뒤이은 사내의 말은 현담의 내적 기대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했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소만. 그대는 혼백을 믿소?"


현담은 그제야 남자를 보다 차분한 시선에서 자세히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보는 이의 이목을 집중시킨다는 것 외엔 별다른 장점이 없어 보이는 색상의 도포는 왜 입고 있고, 머리카락은 왜 저리도 길고 스산스러우며, 게다가 대화의 예법을 전혀 모르는 듯한 언행은 어째서인가.


그야말로 이질성의 현신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 무렵 현담은 본인의 일생에서 가장 큰 허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수문장이 말했던 것처럼, 사내의 눈빛만큼은 산군처럼 맹렬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다른 특이사항을 찾아보려 노력한다면 그것은 단지 시간 낭비일 것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현담의 감성은 그 사내의 처지에 연민을 느끼고 있었고, 이성은 이 대화가 시간 낭비의 유의미함 외엔 아무런 탐구적 자세도 함양하지 못하는 무가치한 것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가혹하리만치 이분법적인 상황이었다. 하여 현담은 자신에게 요구되는 것이 오직 정중함뿐임을 가까스로 떠올린 뒤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그런 것을 믿지는 않습니다. 저 뿐만이 아닌 다른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귀신 같은 전설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요. 그런 영적인 존재들을 믿고 제사 지내는 이들은 오직 신당의 무당들뿐입니다."


"하긴, 맞는 말이오."


"예, 그리고 혹 공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는 이만 물러나 보고 싶군요. 성주님과의 약속이 있어서…… 여유가 된다면 추후에 다시 만나뵙겠습니다."


현담의 말에도 사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저편의 산맥 뒤로 스멀스멀 저물어가는 태양만이 그 정적인 풍경에 생동감을 더할 뿐이었다. 그래서 현담은 조용히 묵례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자신과 고송의 관계에 배신감이 유의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이제 막 문루를 나설 참이었다.


나설 참이었다.


"보여주면 믿을 것이오?"


현담은 다시 돌아섬으로 그 의문을 대신했다.


주홍빛 황혼은 검은 도포의 사내, 그 얼굴의 한 면만을 비추어 광명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내는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었다.


다음 순간 사내의 손에 들린 것은 굵다란 죽통(竹筒)이었다. 그것이 수통 같은 실용적인 물건이 아님은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앞뒤가 막혀있기는 했지만 물을 담거나 흘려보낼 어떠한 지점도 존재하지 않았고, 게다가 수통이라기에는 그 생김새가 지나치게 독특했다.


그 원통형 몸체에는 줄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 줄무늬는 세로로 나 있지 않은 나선형이었다. 또한 줄무늬는 보통 두 색이 명확히 대조될 때 돋보이는 편인데, 그 죽통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선형으로 어우러지는 침향색과 진녹색의 조화. 마치 누렇게 말라죽은 대나무를 녹색 덩굴이 휘감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 황색과 초록색의 기이한 상생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기묘한 미적 감각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현담이 혹시 그것이 귀신이냐고 물어보기도 전, 검은 도포의 사내가 죽통을 가볍게 흔들었다.


처마 끝 풍경이 바람과 함께 댕강 울렸다.


연붉은빛 연기가 죽통에서 배어 나와 흐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연초가 그을리는 곰방대와 비슷했지만,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곰방대는 연기가 물부리에서만 뿜어져 나오는 반면, 죽통에서는 진녹색 나선을 따라 그 비좁은 틈 사이사이로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런 기묘한 물건에서 그윽한 연기가 흘러내리는 모습은 마치 연홍의 피가 우러나는 예술품처럼 보였다. 그때였다.


바닥에 엎은 물처럼 낮게 퍼져 있던 연기가 한데 모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한 곳에 응집한 연붉은 연기는 그 응축된 정도 때문에 색감이 꽤 진했다. 그 연기는 이내 용오름처럼 제자리에서 천천히 맴돌이치더니 난데없이 현담의 키만큼 높이 솟구쳤다. 현담은 알 수 없는 열감에 질겁한 나머지 뒤로 물러섰다.


길게 솟은 연기는 그 끄트머리, 그곳에 무언가가 달린 채로 현담에게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현담은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정확하게는, 극도로 왜곡된 현실을 마주한 사람의 방어 본능에 가까웠다.


여색에 심취할 계획 같은 것은 현담의 일생에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머리만 있는 미녀일 경우에는 더더욱. 한 개인에게는 너무나도 무도한 그 광경에 그만 몸이 얼어붙어버린 현담은, 곧이어 그것의 초롱초롱한 눈을 그대로 마주치게 되었다.


현담은 차라리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굳어버린 그의 몸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해서 그는 대안으로 '묵은 피로 해소하기'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래, 오늘 하루 동안 정말 다사다난한 일이 있었지. 이제 이대로 누워 하룻밤 잘 자고 나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내가 왜 진작에 이 생각을 못 했지?' 하여 현담이 그것을 이제 막 실행하려던 참이었다.


검은 도포의 사내가 죽통을 다시 흔들었다. 물론 그 사내가 현담이 저대로 쓰러질 경우 후두부에 심각한 손상이 갈지도 모른다는 것을 염려해서는 아니었고, 이전보다 더 적극적인 대화를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다. 그 목적이야 어찌 되었든 덕분에 현담은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자신이 이미 한숨 잘 자고 일어난 것이 아닌지 고민하던 현담은, 이내 그 사내의 손에 여전히 들려 있는 죽통을 보고야 말았다. 때문에 현담은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기도 전에 가장 그다우면서도 그답지 않은 결론을 내려야만 했다.


"방금 그것, 그것!"


그 사내는 말이 없었다.


"그거 귀신입니까!"


결국 불편한 진실을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야 만 현담은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세상에나, 그런……"


"아마 그대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오."


"저는, 그러니까……"


"무례를 용서하시오."


현담은 어안이 벙벙하여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도포의 사내는 그런 현담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대에게 여정의 목적을 이야기하기 전에, 나의 은일한 동행자를 먼저 소개하는 편이 나을 듯해서 불러내었소. 그렇지만 그런 모습으로 그대에게 다가갈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소. 나의 실책이오."


"귀신…… 귀신이라, 좀전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우스갯소리가 아니었군요? 귀신이 정말로 실존했다니……"


현담에게 그 사내의 말은 마치 방금 전의 일이 그 존재의 장난이었다고 알려주는 것처럼 들렸다. 현담은 목을 몇 번 가다듬은 다음 일어서 말했다.


"전 괜찮습니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고마워해야 할 듯하군요. 제 추측이 맞다면, 그 미녀가 평소 죽통 안에 있을 때는 보이지도 않을 테니 말이지요. 잘 믿기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시 대면해보고 싶습니다."


현담의 솔직한 고백을 들은 사내는 다시 죽통을 흔들었고, 이번의 등장은 좀 전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신기로운 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시 현담의 눈앞에 나타난 그것이 온전한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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