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실명의 존재들]
침묵이 망자에게나 허락된 그곳에 그녀가 서 있었다. 제멋대로 자란 수풀 사이에 수줍게 숨어 있는 석상이 달빛을 받아 번들거린다. 짐승뼈의 갈비 같은 서까래도 그에 의지하던 지붕도 모조리 털어낸 주춧돌은 그저 원래부터 그런 모습인 양 버젓하다. 아마 그 모습을 멀리서 본다면 고대의 유적지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착각하지 않았다. 그런즉 그녀는 멀리 있지 않았다. 오히려 가까웠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에 코끼리를 마주한 개미를 대입해보고 있었다. 그 이유라 함은 그것에 매우 밀접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석탑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탑은 세로로 세워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로로 눕혀져 있었다. 그 까닭을 알고 있었던 그녀는 손을 내밀어 탑신을 매만졌다. 거의 뱀의 비늘 같은 감촉이 손끝을 파고들자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끼침을 느꼈다. 곧이어 그녀는 탑의 너비를 정확히 가늠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지만, 그 행위는 측정보다는 오만에 가까웠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뒤를 돌아 한참을 걸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뒤를 돈 그녀는 탑의 비현실적인 크기에 경탄했다. 쓰러질 때의 충격이 워낙 컸던 탓에 땅에 몸체가 반쯤 묻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탑은 아득할 정도로 거대했다. 그리고 탑의 끝부분까지 걸어가려면 며칠이나 걸릴지 예상해보던 그녀의 눈에 다른 존재들이 들어왔다. 그 '존재'들은, 탑의 압도적인 크기 탓에 그녀가 잠시 잊고 있었던 것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힘없이 널브러진 탑들의 존재에 집중하는 것이 그리 보람찬 일은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러는 대신 탑의 일그러진 형상에 주목했다. 정확히는 그럴 때였다.
"개판이군요."
그녀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사블도리. 이곳은 세 치 혀로 쉽사리 모욕해도 되는 장소가 아니야. 고로 최소한의 존중은 갖춰줘야겠지?"
"그게 그렇게나 중요한가요? 어차피 저희는 이 여덟 개의 탑들을 추모하러 온 건 아니잖습니까."
"지금 너와 언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구나. 도리야, 저리 가서 탑의 겉면을 보고 만져 봐. 그리고 느낌을 말해 줘. 어떤 기분이 드는 지 궁금하구나."
사블도리는 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어떠니?"
"아직 만지지도 않았습니다만."
"그럼 어서 만져 보렴."
곧이어 석탑의 외피를 문질러본 사블도리는 마치 오물이라도 만진 듯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이거…… 미지근하군요. 아니, 미지근하기보단 약간 따듯한데요. 그 풍문이 과연 사실이었군요."
"그래. 기이하구나."
"단순히 기이하기보단 요사스럽기까지 하군요. 분명 탑들이 이런 꼴이 난 지는 몇 개월이 넘었을 텐데, 어떻게 아직까지 따듯할 수 있는 걸까요?"
"다른 탑들도 마찬가지일까?"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겠는데요. 어차피 넘어진 건 마찬가지인 데다, 세워진 목적도 똑같잖아요. 그리고……"
"그리고?"
사블도리는 자리에 냅다 주저앉았다.
"여기서 다른 탑들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려면 너무나도 힘이 듭니다. 저기 남은 일곱 개의 탑들을 일일이 확인하려면 말이 여섯 필은 필요할 지도 몰라요.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 쉬십시다."
"글쎄. 서너 필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그렇겠죠. 두 마리는 잡아먹고 나머지를 타고 가면 충분하겠군요?"
남은 탑들의 간격을 가늠해 본 서달라는 부정하려다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팔각형의 꼭짓점 모양으로 세워진 팔방탑(八方塔)들은 그 꼭대기가 하늘을 향하기에 서로 만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이야기이다. 이제 대지 위에 드러눕게 된 탑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아무런 위해도 끼치지 않고 있었다. 천운이라고밖에 설명되지 못할 현상이 탑들의 모든 방향으로 작용된 탓은 아니었다.
그저 아득한 물리적 거리가 운명의 집착을 떼어내었기 때문이다. 서달라는 그 상황에서 운명을 상회한 현실이라는 해학적 요소를 찾아내었다. 그러나 기뻐하지는 않았다.
"네 말에 동의한다. 도리야."
"아주 고맙네요. 자, 그 상태 그대로 한번 앉아 보세요. 바로 뻗을지도 모르죠."
"네 휴식 제안에 동의하고 싶진 않네. 난 아직도 궁금한 게 남아 있단다."
"탑이 따듯한 이유 말입니까?"
"그것도 있지만, 더 이상한 건 따로 있잖니. 탑이 어떻게 쓰러진 걸까?"
서달라는 사블도리를 향해 느긋하게 걸었다.
"이상하지 않니? 이렇게나 거대한 탑들이 쓰러졌다는 것이."
"세월 앞에서 영원함을 논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지요."
"좀 더 직관적으로 말해주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이미 충분히 직관적입니다."
"당연히 네 기준에선 직관적이겠지만, 나에게는 너무나도 심오하게 들린다는 걸 네가 유념해 두면 좋겠네."
"그러시군요? 그럼 저기를 보세요. 제 말을 이해하게 될 겁니다."
사블도리가 가리킨 곳은 석탑의 하단 부분이었다. 그 위에 쌓아 올려질 일곱 개의 층들을 보다 수월하게 견뎌내기 위해 상대적으로 두껍게 만들어진 탑의 첫 번째 층은, 그 형태가 매우 괴이했다. 서달라는 그것이 단순한 착시가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저건 미처 못 보았는데. 탑의 아랫부분만 녹아 있구나. 무슨 얼음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왜?"
"왜라니?"
"왜가 더 잘 어울립니다. 우리는 그 방법을 알 수가 없지만 까닭은 알 수 있지요. 세월 앞에서 영원한 건 없으니까요."
"그래. 오래된 돌은 물론 풍화되지. 하지만 저절로 녹아내리지는 않잖니."
"제 말이 바로 그겁니다. 탑이 자의로 무너질 리는 없어요. 하지만 타의에 의해서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죠. 당신도 그걸 예상하고, 또 들은 뒤 여기에 오지 않았습니까? 분명 누군가가 탑들의 밑부분만 녹여버린 겁니다. 탑을 아예 무너트릴 요량으로요."
서달라는 사블도리의 말에 동의했다. 서달라가 처음 팔방탑이 붕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그 사실을 의심하는 대신 누가 탑을 무너뜨렸을지를 더 궁금해했다. 그리고 서달라는 그 까닭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네 말이 맞다. 그렇다면 탑들을 누가, 그리고 왜 무너트린 걸까."
사블도리는 묵언했다.
"대체 왜?"
"아마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알린 것일 겁니다. 허울뿐인 의미의 천군은 이제 사라졌다고요. 그래서 그 상징과도 같은 팔방탑을 '밀어버린' 거겠지요. 그럼으로써 모두가 새 시대로 향할 수 있게 길을 터준 게 아닐까요."
"마치 그 행위자가 인격체라도 되는 듯 말하는구나. 물론 나도 동의한다만."
"예. 어쨌거나 모두가 암묵적으로 바란 일이었습니다. 그 염원을 한데 모아 실현시킨 거지요."
"…… 그래. 네가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지금 난 그자를 찾아내고 싶구나. 어쩌면 쉽게 찾을지도 모르지 않겠니."
사블도리는 그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돌아갑시다."
"돌아가자고?"
"예. 탑을 녹여버릴 정도의 힘을 구사하는 이를 찾으려면 여기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조금만 걸어가면 이곳까지 오기 전에 두고 온 수하들이 말과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또 소문이 진실이라는 것도 확인했잖아요? 이곳에 더 남아있을 이유가 없지요."
"물론 그래야겠지. 너무 오래 걸었기도 하고. 다만 그 전에."
서달라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은 뒤 그 안에 고이 숨겨둔 망치와 정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두 눈을 반짝이며 사블도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녀린 체구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그 모습은, 마치 사블도리에게 주종 관계를 이참에 제대로 상기시켜 주겠다고 외치는 듯했다.
"아니, 그건 뭣하러 꺼내드신 겁니까?"
"이 석탑을 가져가기 위해서. 들기엔 너무 무거우니까, 이걸로 조금씩만 떼어가야겠다."
"이 장대한 역사를 가진 탑을 떼어가겠다고요? 당신, 역시…… 역시 그랬던 거군요."
서달라는 탑에 정을 안정적으로 고정시킬 만한 곳을 찾다가 멈추었다.
"무슨 말이지?"
"이 먼 곳까지 온 기념으로, 그에 걸맞는 기념품이 필요했던 거지요? 그래서 그런 연장들을 가지고 오셨겠지요."
서달라는 그저 미소지었다. 사블도리의 엉뚱한 말이 재미있어서라기보단, 그저 그의 공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탑의 표면에 정을 고정시킨 서달라는 고작 망치질 몇 번에 그 일부를 떼어내었고, 추락한 탑의 조각을 주워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서달라는 아련한 눈빛으로 탑들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사블도리 또한 그녀를 말없이 뒤따랐다. 그런 그들의 앞으로는 태양이 다시금 떠오르며 새벽녘의 냉기를 몰아내고 있었다. 그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