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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유의 하루 Oct 27. 2024

체크리스트를 던져 버려라

이유불문 스트레스 스위치를 과감히 끄자

집중 치유 초반 다양한 변화를 한꺼번에 실행했습니다. 동시에 여러 변화는 신체적, 정신적 부담이 클 수밖에 없지만, 한 번에 하나씩 진행하기엔 마음이 급했습니다. 흔히 변화가 어렵다 하지만, 어디로 갈 것인지 방향성을 정하고 강력한 동기가 더해지니 짧은 기간 삶이 온전히 뒤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녹즙 마시기부터 산책, 명상, 주열, 온열, 비타민 IVC, 커피 관장 등 시간대별로 알람이 울렸습니다. 매일 거의 같은 일정이 반복되니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점심 보조제 챙겨 먹었는지, 아침에 먹은 게 헷갈린 건지, 어제 기억인지 말입니다. 포스트잇에 키워드를 적고 할 일에서 한 일 영역으로 옮기는 방법도 써봤습니다. 모든 계획을 잘 지키고 싶어 확인표를 만들어 벽에 붙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아주 자연스러웠습니다. 목표 설정 후 실행 계획은 저의 특기였으니까요.


앞으로 얼마나 많이 체크를 해야 하는 걸까


한 달도 되지 않아 동그라미를 향한 집착은 괴로움으로 번지고, 종이 위 동그라미 표시는 멀리서 날아오는 무거운 돌멩이처럼 다가왔습니다. 중간에 실행하지 못한 기록을 남길 때면, 엑스 표시 하나가 전체를 부정하는 것 같이 칼로 베인 듯 쓰라렸습니다. 가독성이 탁월한 확인표는 곧 성과보고서, 성적표처럼 보였습니다. 완벽히 해내고 싶고 성공해야 한다는 마음만으로도 벅찼습니다. 기록은 기록일 뿐이지만, 자기 평가에 관대하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O와 X를 성공과 실패로 받아들이는 관점이 오래된 습관처럼 굳어져 있었습니다. 일상에서 변화로 수반되는 스트레스 좋은 자극이기도 했지만, 전시 상황 중에는 스트레스는 자살폭탄과도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고집한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으로 무수히 많은 성공경험이 있다더라도, 이번만큼은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체크리스트를 버려라'라고 셀프 처방하게 된 이유입니다.



체크리스트 버리는 대신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틀을 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메모했습니다. 밑줄 만 그어진 노트에 날짜를 적었습니다. 그 아래로 전반적인 컨디션부터 기상 시간, 하루 식사 메뉴, 방귀 횟수와 냄새, 대소변 양상, 커피 관장 느낌, 새롭게 시도한 것, 스쳐 지나간 생각, 산책 코스, 산책 중 본 나뭇잎 모양과 나무 촉감까지. 아주 세세한 것까지 모두 적었습니다.


매일 동일한 일상인 줄 알았는데, 적어 보니 아니었습니다.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주간, 월간 기록을 이어 보니 변화의 흐름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잘하고 있는지, 부족한 것은 없는지, 지금 이 시점에서 집중할 영역은 무엇인지 등 방향성과 속도를 조절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정확하고 시의적절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갑자기 특정 간 수치 하나만 눈에 띄게 증가하였는데, 당장 멈추거나 조심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빠르고 정확한 판단이 필요했습니다.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인지 머릿속으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지난 3개월과 6개월 기록을 비교하며 지난 기억을 훑어봤습니다. 그 무렵 '구충제 복용'을 유력한 원인으로 보고 별다른 조치 없이 다음 달 혈액검사 결과를 확인해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다행히 수치는 정상으로 돌아왔고, 추후 구충제 복용과 함께 단기 집중 해독 기간을 갖는데 집중했습니다.


또 한 번 강력한 기록의 힘을 경험한 사례로 수술 후 배뇨 장애를 치료할 때였습니다. 카테터로 자가 도뇨를 한 소변량, 이후 잔뇨량을 시간대별로 확인했지만 하루 6~8번 사이에도 수치가 들쭉날쭉 널뛰었습니다. 약을 얼마나 더 먹어야 할지, 자가 도뇨를 언제까지 지속해야 할지, 의학적 도움이 필요하진 않은지 등 감으로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4주간 수치를 기록하고, 표로 정리해 보니 그래프를 그려볼 필요도 없이 쉽고 빠르게 추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담당 교수는 제가 가져간 기록을 보며 처방해주기도 했습니다.



한 때는 체크리스트를 경멸(?)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누군가에겐 체크리스트보다 기록이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때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 다르겠지요. 체크리스트는 내가 닿고자 하는 방향을 간결 명확하게 알려주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작은 성취를 확인하는 과정은 지속 가능성을 높여줄 수도 있습니다.


체크리스트와 기록은 도구일 뿐입니다.

나는 어떤 도구를 사용 중인가요?

나를 돕는 도구인가요?
혹시 나를 뒤흔들고 있진 않은지요?


내게 어떤 도구가 필요한 지 막막하다면, '아주 작은 기록'부터 시작해 보시길 추천합니다. 1~3개월 간 기록을 흐름으로 읽어보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실 겁니다. 내게 딱 맞는 도구를 찾으시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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