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는 결국 남편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지방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리로 이사 가면 자네 고생 안 시켜. 당신은 일도 하지 말고 편하게 살게 해 줄게. 그니까 우리 그리 가자. 김 씨 말 들어보면 나중에 엄청 비싸게 팔릴 자리라는데 그걸 놓칠 수 있나? 가야지"
김 씨의 말만 철석같이 믿고 계약하고 보니 토지대장에 길도 없는 땅이고 남의 땅을 밟아야 지나다닐 수 있는 팔리지도 않는 곳이었다.
집도 좋다더니 부엌도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가마솥이 걸린 데다가 방에서 나와 부엌으로 갈 땐 신발을 신어야 했고 방이라고는 하나뿐이었다.
"내가 맥주 사다 방에 넣어줄 테니 그거나 먹고 있어. 내가 다 알아서 고쳐놓을 테니까 당신은 걱정 말어. 신경하나 쓰지 마"
실망스러운 건 윤기도 마찬가지였으나 큰소리는 땅땅 쳐놨으니 일단 순자를 달래야 했다. 남편의 입에 발린 소린 귓등으로 흘려들은 순자는 이 집에서 살려면 집을 개조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손재주가 좋은 윤기와 순자는 집을 고치고 창고를 개조해 쪽방으로 만들었다. 신식으로 싱크대를 놓고 가스레인지를 사기 위해 딸 태영을 잠깐 싱크대 가게에 맡겨두고 도배지를 사러 다녀왔다.
"엄마 금방 올게, 여기 가만히 있거라. 알았지? 어디 나가면 안 돼!"
"... 응... 요기 잘 찾아와야 대?!"
태영은 '오리표싱크대'라는 가게 간판을 가리키며 잘 찾아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엄마가 연탄 장사를 할 때도 종일 집에 혼자 기다리며 놀던 아이였다. 오빠들이 밖으로 나가 놀아도 혼자서 집에서 종이 인형을 가지고 놀았다. 학교에 가기 전부터 연탄불도 갈고 밥도 안쳤다. 이제 열 살이나 되어서인지 엄마를 기다리는 건 이골이 났다.
몇 날 며칠을 집을 고치느라 윤기와 순자는 정신이 없었다. 편하게 해 준다는 윤기의 말은 마음으로는 그랬을지언정 순자는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할 수 없었다. 집수리를 마치고 큰형의 아이들이 살던 서울집에 머물던 윤기의 어머니도 모셔왔다.
집 뒤켠에 노는 땅을 빌렸다. 이웃에게 소를 한 마리 빌려다 고랑을 일었다. 밭을 갈고 채소를 심었다. 덥고 지치는 여름도 자라나는 채소들과 곡식들을 보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논을 빌려 농사도 지었다.
순자의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경험들이 귀하게 쓰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모내기를 하러 가면 한쪽 구석에 태영이가 못줄을 잡았다. 사람들이 여럿이 못줄에 나란히 줄지어 모를 심고 나면 태영이는 수신호에 맞추어 한 줄씩 자리 이동을 해주었다.
노랗고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은 어른들과 달리 맨 몸으로 논두렁에 앉았던 태영이는 거머리에 물려 한바탕 난리를 쳤다.
어른들은 제자리에서 다리 한 짝을 들고는 얼음이 되어 울부짖는 태영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파란 하늘이 심어진 논 한가운데 그림 같은 한 때가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