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군번 훈련병의 일기 (1.군인이 되기까지)

Episode 1 : 신체검사 & 징집통지서

by 행복상상

1장. 군인이 되기까지


(1) 병무청에서


1990년 9월 19일(수). 오전 10시 정각.

드디어 그날이 왔구나. 맘을 굳게 먹어야지. 심호흡, 후~ 후~.

오늘은 신체검사를 받는 날. 몸 어딘가 병이 나서 그런 거냐구? 천만에. 빼빼 마른 몸집이지만, 이래 봬도 1미터 하고도 72센티미터에 몸무게가 자그마치 57킬로그램이나 나가는 건강한 남자라고. 그럼 왜 신체검사를 받느냐? 궁금해? 다 이유가 있지. 힌트를 줄까? 용산구 후암동 소재 서울지방병무청. 바로 오늘 국가의 부름을 받아 내가 가야 할 곳이지. 그래, 맞아. 오늘부터 난 대한민국의 국토방위라는 신성한 병역의 의무를 지게 되는 거야.


아이고, 이러다간 제시간에 못 대겠다. 괜히 말을 시켜가지고. 어디 보자, 집에서 한 번에 가는 방법이 없으니 중간에 갈아타고 가면 되겠네. 아버지,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 부~웅.


병무청 앞.

삼삼오오 짝을 이룬 사내 녀석들이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서성대고 있네. 보나 마나 뻔하지. 귀여운 녀석들. 보아하니 고등학교를 갓 졸업했거나 고 3 정도 되어 보이는데. 이 엉아를 잘 따라오렴. 그런데 다리가 왜 이리 떨리지? 자, 침착하자. 이 정도 갖고. 흠흠.


빈자리에 가서 앉았더니 질문 내용이 빽빽이 들어있는 설문지가 앞에 놓였는데 별의별 내용이 다 들었더라고. 집을 나가고 싶은 심정이 든 적이 있느냐? 동상은 자주 걸리나? 여러 사람과 함께 있으면 답답한가? 등등. 질문의 의도가 명백해 보였지만 기말고사를 치르듯 열중했지.


설문을 마치고는 탈의실에서 복싱할 때 입는 트렁크처럼 생긴 반바지로 갈아입고 우람한 체격(?)을 뽐내며 검사장으로 올라왔어. 몇 날 며칠을 두고 고민하던 문제가 해결되려는 순간이 다가온 거야. 바로 전날까지 방위병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현역병으로 갈 것이냐를 두고 고민 고민을 해 왔었지. 결국 내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고 아빠한테 매달릴 수밖에 없었지만.


"방위병이든 현역이든 간에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기도의 순서가 '현역이든 방위병이든'이 아니라, '방위병이든 현역이든'이라는 거야. 말하자면 방위병으로 갔으면 하는 맘이 쬐끔 더 많다는 거지. 그렇다고 야유까지 할 건 없잖아. 좀 더 편했으면 하는 게 인지상정이니까.


어쨌든 키, 몸무게, 신체 이상 유무, 시력, 내외과, 이비인후과, 정신과, 치과 등등 오만가지 검사를 대충(?) 받은 후에 18개월이냐, 30개월이냐를 결정짓는 심판대 이에 올랐어. 심판관은 온통 파란색으로 얼굴을 치장한 컴퓨터 모니터였지. 얼마나 있었을까 뒤통수를 보이고 있던 심판관이 드디어 뒤로 돌아 앉았어. 그러더니 대뜸 이렇게 말하는 거야.


"니, 현역이데이~"


버스 정류장으로 내려오는 길이 왜 이리도 허전하지?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만 같아. 컴퓨터야 사람이 입력한 대로만 움직이니까 잘잘못을 따져봐야 나만 손해일 거고, 신체등위 2급의 건강한 대한민국 남자로 30개월 동안 입대해서 병역이라는 신성한 의무를 다하게 된 사실이 자랑스럽긴 하지만, 자꾸만 밑지는 장사를 한 것 같은 이 느낌적인 느낌은 뭐지? 잘하면 방위병으로 갈 수도 있었는데.


"하나님 아빠! 나 다시 한번 하면 안 될까요? 제발요. 응?"


(2) 징집통지서


1991년 2월 8일(금).

갑자기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어. 발신자는 서울지방병무청장. 내용물은 '현역병 입영 통지서'.

맞아. 소위 징집영장이라고 부르는 종이쪽지야.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인데 기분이 즐겁지만은 않네. 왜지? 방위병으로 갈 걸 잘못했나? 오늘따라 하늘이 왜 이리 흐릿해 보이나. 힝~


(3) 환송회


1991년 4월 27일(토). 교회 기도실.

교회 청년부 형제자매들과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어색한 마음을 가지고 모여 앉았어. 싸우기도 많이 했고 - 그 덕에 키카 큰지도 모르겠지만.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고 하니까 - 같이 웃고 울기도 많이 했던 얼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얼굴이 굳어져 오는 게 느껴지는 거 있지.


이윽고 사회자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라는 거지.


"형제자매 여러분, 이 모임에 첫 발을 디딘 후로 지금까지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아낌없는 사랑으로 감싸주신 여러분의 변함없는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비록 몸은 여러분의 곁을 떠나 있더라도, 이곳과 여러분의 얼굴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시니 저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습니다. 제가 어딜 가든지 불꽃같은 눈으로 절 지켜주실 테니까요. 30개월의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여러분 앞에 설 때에는 더욱 성숙된 모습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십시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미리 준비해 둔 대사야. 어때? 근사하지? 그런데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고 보니까, 며칠간 공들여 연습해 놓은 고별사가 전혀 생각나지 않는 거야. 대충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얘길 할 수밖에 없었지. 이럴 수가! 공든 탑이 무너지다니!


고별사를 마치곤 마룻바닥에 엎드린 채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폭탄 세례를 받았어. 무슨 폭탄이냐고? 정말 가공할 만한 위력을 지닌 폭탄이지. 천국제 기도 폭탄! 게다가 보너스로 기관총(침) 세례까지 받았어. 아이고 힘 빠져.


(4) 입영전야


주일 예배를 마치고 교인분들과 인사를 나누었어.

군에 간다고 하면 다들 죽으로 가는 줄로 아나 봐. 안 됐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지 않나, 이마에 주름을 가득 짓고 걱정을 하지 않나. 이러다간 정말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꼴이 되겠지 뭐야. 그래서 속마음이야 착잡하지만 여유 있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아, 자랑스럽다. 내 모습. 믿음직스럽다 내 모습. 대한건아여!"


밤하늘의 별은 어째서 저렇게 반짝이는 것일까? 방금 자른 머리가 별빛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반짝이는 것 같은 썩 유쾌하지 못한 기분을 곱씹으며 현관을 들어섰어. 그 순간. 웃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식구들의 눈망울들. 순간 내 맘을 대변하듯 떠오르는 트로트 한 대목. 가수 현철이 부릅니다. '싫다 싫어'


"싫다 싫어, 꿈도 사랑도. 싫다 싫어, 생각을 말자.

당신의 거미줄에 묶인 줄도 모르고 철없이 보내버린 내가 너무 미워서

아차해도 뉘우쳐도 모두가 지난 이야기~"

- 1990년 5월 30일 발매 / 이호섭 작사, 박성훈 작곡 -


저녁 식탁. 내 처지를 대변해 주는 것 같은 모습의 반찬이 올랐어. 오늘 막 도살장에 끌려갔던 송아지의 유해(?) 말이야. 근데 그 녀석이 나한테 이렇게 얘기하는 게 아니겠어?


"불쌍한 녀석. 머지않아 니도 나처럼 될끼다. 많이 먹어 두그래이"


아니, 송아지 주제에 사람인 나를 놀려? 내 처지를 비웃는 듯한 생각이 들자 난 이성을 잃고 말았어. 널 사정없이 깨물어 주겠어. 고기와의 전쟁 선포. 닥치는 대로 찌르고, 최루탄(고추장)을 쏘고, 그물(상추)로 포박한 다음, 마구잡이로 물어뜯었지. 역시 로스구이는 쌈으로 먹어야 제 맛이야. 아, 이 기막힌 우리 집밥을 언제나 다시 맛볼 수 있을까나. 흑흑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