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군번 훈련병의 일기(4.병아리의 첫걸음)

Episode 4: 병아리의 첫걸음

by 행복상상

(3) 걸음마


1991년 5월 6일(월). 입사식(?)


연대 연병장에서 세리머니가 있었어. 이제부터 대재벌 국방부 주식회사의 277기 신입 사원으로 정식 계약이 된 거지. 매달 칠천 원을 조금 웃도는 월급과 연초비 수당, 석 달에 한 번씩 상여금 100%가 지급되는 조건으로. 여타 기업에 비해 봉급은 박하지만, 대신에 기숙사 제공에 세끼 식사와 간식을 무료로 제공하고, 공무원에 준하는 신분이 보장되는 이점이 있지. 체력단련과 의료시설 이용도 공짜로 할 수 있고 말이야.


갑자기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성공의 비결이니까, 원영적 사고(?)는 필수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열심히 해야 보람이 있지 않을까?


6주 동안 진행되는 훈련의 첫 과정은 걸음마를 배우는 것부터야. 마치 햇병아리가 어미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똑같이 따라 하는 것처럼 조교가 가르치는 대로만 하면 돼.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고,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되니 얼마나 쉬워?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고.


하지만 문제는 2.7 킬로그램 짜리 소총을 들고 한다는 거야. 맨 손이 아닌 집총 제식훈련은 어깨가 계속 눌려서 아프고 힘들어. 어떻게 안 할 수 없나.


(4) 너의 이름은?


일석점호가 끝나고 취침시간이 되면 교대로 불침번을 서거나 외곽 초소로 경계 근무를 나가는데, 5월이긴 해도 내 집에서 자는 것만 못해서 야상(야전상의)을 입고 있어도 얼마나 추운지 몰라. 이런 상태에서 근무를 마치고 다시 잠자리에 들면 뱃속이 허전한 게 별로 먹지 않던 것들도 눈앞에 삼삼한 게 죽을 맛이지.


사 먹으면 될 거 아니냐고? P.X.가 편의점처럼 24시간 영업을 하면 가능하겠지만, 방위 포졸들은 전쟁 중에도 어김없이 오후 6시에는 퇴근을 해야 하니까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얘기지. 더구나 밤에는 취식 행위가 전면 금지되어 있어서 배가 고파도 참아야 하는 거야. 몰참(몰래 간식을 먹는 일)을 하다간 응징을 당하게 되지.


"부스럭, 부스럭"


갑자기 옆에 있던 녀석이 낮에 P.X.에서 사 두었던 과자를 꺼낸 거야. 그다음은 뻔하지. 저녁 먹은 건 이미 꺼졌고, 입은 심심한데 과자가 보였으니. 여기저기서 SOS 신호가 접수되고, 침상 너머로 공중 수송이 이루어지다 보니, 때맞춰 순찰을 돌고 있던 내무실장의 작지만 예리한 레이더망에 걸린 거지 뭐. 장물은 현장에서 압수당하고, 입안까지 탈탈 털어낸 끝에 공범들까지 일망 타진한 다음 유유히 사라지는 그 뒤에다 대고 욕을 해봤자 이미 상황은 종료.


하지만 깜짝 놀랄 상황은 그다음에 벌어져. 아직도 걸린 애들이 엎드려뻗쳐를 하고 있는데, 용감한 몇몇은 반합이며 관물대의 전투화, 전투복 사이에 숨겨두었던 빵과 건빵을 꺼내 먹는 거야. 아, 위대한 훈련병들의 소화기관이여!


어느 누가 말했던가, '춥고 배고픈 자여, 너의 이름은 훈련병'이라고! 그나저나 나도 좀 주면 안 될까? 응?



(5) P.R.I (사격술 예비 훈련)


M16 소총.

2.7 킬로그램짜리 인마(인간의 탈을 쓴 악마) 살상용 무기야. 하지만 쏠 줄 모르면 그냥 장난감에 불과하지. 애들이 갖고 놀기엔 좀 무거운?


걸음마를 떼자 우리는 지급받은 소총을 들고 영내의 모래밭에서 사격 연습을 시작했어. 2인 1조로 과녁에 조준한 자리를 인당 3번씩 연필로 표시하면서 삼각형이 조그맣고 예쁘게 잘 만들어지는 지를 보는 거지. 한 번이라도 잘못하면 길쭉한 모양이 되거나, 아예 과녁 밖으로 나가버리니까 신경을 많이 써야 해. 이걸 전투가늠자 찾기(영점사격)라고 해.


며칠 동안 모래밭에서 을 뒹굴고 나서, 우리는 총을 멘 채 수 킬로를 걸어서 영점 사격장에 도착했어. 과녁에 하나도 안 맞으면 어쩌지? 조금씩 찾아오는 긴장감.


In the line of fire(사선에서).


"사수 앞으로.

엎드려 쏴. (철퍼덕하고 엎드려서 소총을 앞으로 하고)

탄알집 장전. (탄창을 끼고 과녁을 겨누는데, 심장은 쿵쿵, 호흡은 가빠오고. 침착해, 침착해~)

제 일발 장전. (찰칵하고 노리쇠를 후퇴. 이제 목표를 겨눠야 해. 제발 제발)

준비된 사수로부터 발사!"


탕, 탕, 타타탕... 삐이이---------------------


영화에서 봤어. 총을 쏘고 난 후에 귀가 먹먹하고 삐 소리 밖에 안 들리는 장면을. 그게 사실이었네. 표적지 뒤에서 먼지가 피어오르고, 화약 냄새가 코를 간지럽혀. 맞춰야 한다는 것 밖에는 생각나는 게 없어.


"우선 사격 끝. 좌선 사격 끝. 전선 사격 끝!

탄창 제거. 사수 소총 놓고 일어 서. 표적지 확인!"


"백발백중, 백발백중..."을 외치며 표적으로 향하는 길. 아싸, 탄착군이 예쁘게 형성되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조준 간의 클리크만 조금 수정해서 표적지의 가운데로 이동하면 돼. 그런데 이게 왠일이야. 수정을 하고 또 해도 매번 약간씩 비켜가는 건 똑같은 거야. 아무래도 특등 사수가 되는 꿈은 포기해야 할 듯.


사격 성적이 시원찮았는지 중대장이 계속 P.R.I(Preliminary Rifle Instruction)를 시켜대는 거 있지. 엎드려 쏴, 앉아 쏴, 쪼그려 쏴, 서서 쏴 등등 폼 연습은 그래도 나은데, 전진무의탁으로 들어가면서는 아이고 정신없어. 앞에 의탁할 게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서 갑작스런 적의 공격에 대응하여 엎드려 사격하는 걸 연습하는 건데, 구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래밭으로 돌진. 퍽! 먼지가 피어오르고, 땀이 떨어지고, 팔꿈치에선 피가 나고, 50번인지 100번인지 숫자도 헤아릴 수 없이 반복되는 훈련에 힘이 빠지면서 총구는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거야. 그래도 휴식 시간은 지켜야지. 사이다 한 모금으로 목에 걸린 먼지 알갱이를 쓸어 내는 맛이라니. 캬~


드디어, 실거리 사격장.

7킬로미터를 걸어가서 만난, 화약 내음과 총알의 파편들이 박혀 있는 곳. 제발 70%만 넘기자.


"사수 입사호 안으로. 준비된 사수로부터 최초 250사로 봐! (아, 표적이 너무 작은데.)

하나 둘 셋 넷 다섯. 탕타타탕!

100사로 봐. (이번 건 큼지막하다. 다섯 안에 쏴야.) 탕타타탕!

200사로 봐. (이번에도 다섯 안에.) 타타타탕!"


멀가중(멀리 가까이 중간) 멀가중 멀중가중. 입사호 안에서 10발, 엎드려 쏴 자세로 10발. 총알이 날아가는 건 안 보여도 먼지를 날리며 넘어가는 표적을 보면 기분이 좋아져. 20발 중에서 17발이 명중. 엎드려 쏴 자세에서 3발을 놓쳤지만 85%를 넘겼으니 이만하면 됐어. 70%를 넘기지 못한 녀석들이 돌 밭에서 기는 동안 한쪽에서 PRI. 오후에는 모두가 잘 쏘기를 바라며.


오후에도 사격 성적이 계속 안 좋아서 하가 난 중대장의 독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단체로 얼차려 실시. 속에서 분노가 일고, "안 되는 걸 어떡하란 말야!" 라는 말이 목구멍에 가득 찼지만, 피로로 쌓인 몸 어디에서 이런 고통을 견디는 힘이 나오는지 옆 동기들과 눈길을 주고받으며 함께 버텨냈어.


이윽고, 얼차려도 끝나고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놀을 바라보며 우린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어. 끝난 거야, 피가 튀고 알이 배고 이가 갈리는 훈련이. 당분간이지만 그래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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