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군번 훈련병의 일기 (2.군인되기 1,000m 전)

Episode 2 : 천국에서의 5일

by 행복상상

2장. 군인이 되기 1,000미터 전


(1) 입소


1991년 4월 29일(월). 06시 30분.

일찌감치 집을 나섰어. 부모님과 함께. 오늘은 논산 훈련소로 입소하는 날이야. 새벽 공기가 마음을 서늘하게 감싸왔어. 혼자 가려고 했지만 굳이 따라오시겠다는 걸 막을 수가 있어야지. 못 오시게 막자니 그 또한 불효가 되는 것만 같아서. 그냥 잠자코 침묵 속으로 빠져드는 게 상수겠어.


07시 30분 정각. 서울시내 모 구청 앞.

내 나이 또래의 머스마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서성이는 모습이 보여. 정말 우스워. 하나같이 짧은 머리를 사제 모자에 감추고 있으니 말이야. 그래봐야 오늘 오후면 국방부 모자로 바뀔 텐데. 하긴, 짧아진 내 머리도 큼지막한 모자 속에 있긴 하지만서도.


고속버스 안. 창 밖으로 낯선 풍경이 지나가. 고속도로를 달리는 기분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차 안의 공기는 중력에다가 플러스알파를 한 듯 무거워. 이렇게 묵직한 만유인력을 감당할 수 없어서인지 자꾸만 고객가 숙여져. 이어폰을 끼고 워크맨에서 나오는 '입영열차 안에서'를 듣자니 눈꺼풀이 수직 낙하를 거듭해. 아~함.


"어색해진 짧은 머리를 보여주긴 싫었어. (중략)

그곳의 생활들이 낯설고 힘들어 그대를 그리워하기 전에 잠들지도 모르지만~"

- 「입영열차 안에서」/ 1990년 발매 / 작사 박주연, 작곡 윤상, 노래 김민우 -


촌구석.

논산을 본 첫 소감이야. 이런 시골 동네에서 6주 동안이나 버텨야 하다니, 눈앞이 아득해.


이윽고 입소식.

대충대충 안내의 말이 있은 뒤에, 입소 병력들은 사열대 앞으로 나오라는 방송이 나왔어.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한숨 소리, 울음소리, 웅성거림. 나는 그저 담담한 얼굴로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올리고는 뛰어나왔어.


"나도야 간다. 나도야 간다

젊은 세월을 눈물로 보낼 수 있나~"

- 「나도야 간다」/ 1984년 발매 / 작사,작곡,노래 모두 김수철 -


친구는 지금 이 시간에 퇴소식을 마치고, 저쪽 매점 어딘가에서 면회를 하고 있을 텐데. 누군 나가고, 누군 들어가고. 희비의 쌍곡선이구만. 이런 생각을 하며, 연병장 모퉁이를 돌아 스탠드가 안보이기가 무섭게 헐크 등장! 그것도 떼거지로. 조금 전까지 깍듯하게 존댓말을 쓰고 예의를 갖추던 조교들이 모두 야수로 돌변하는 거야.


"야! 이 xx들아. 줄 똑바로 안 서? 이것들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여기가 너희들 소풍 장손지 알아?"

"어쭈. 그래도. 앉아. 일어서. 앉아. 일어서."

"앞으로 며칠 동안 대기를 하는데, 하는 짓이 지금과 같다. 그러면 모두 죽을 줄 알아. 알았어?"


"네!!!!"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를 수밖에. 불쌍한 내 팔자야.


입소대대 내무반.

보급품을 받아 국방(카키) 색 옷으로 갈아입고, 가져온 옷가지들을 종이에 싸서 집으로 부치자니, 한 시간만이라도 시간이 뒤로 밀렸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해. 이럴 줄 알았음 좀 늦게 들어올걸. 사회야, 안녕~!


(2) 대기병


1991년 4월 30일(화). 오전 06시 정각.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팔소리.


"빠 바바빠 바빠 바빠라빠 바빠라빠 빠 바빠빠~"


누구야? 누가 내 단잠을 깨웠나? 관심법을 동원해야 말을 하갔어? 응? 그런데,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야. 갑자기 고함소리와 욕설이 하늘을 가르네. 참, 내 정신 좀 봐. 여긴 훈련소지! 후다닥 군복으로 갈아입고 인원 점검 및 아침 점호. 끝나기가 무섭게 막사 안팎 청소. 곧이어 세면. 푸카푸카, 치카치카. 아~ 개운해.


정신없던 아침 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고대하던 아침 식사시간. 옆 사람들과 서먹함을 느낄 새도 없이 오와 열을 맞추어 식당으로 행진.


"행진~ 행진~ 행진 하는 거야. 앞으로.

난 노래할 거야. 매일 그대와.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 「행진」/ 1985년 발매 / 작사,작곡 전인권, 노래 들국화 -


식판을 들고 주의사항을 들은 후, 김이 자욱한 실내로 들어선 순간. 아니 이것은? 빵!!


내 눈이 잘못되었나? 아니면 내가 시방 미군부대에 와 있는 겨? 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 아침으로 빵을 다 주고. 모닝 브래드가 친숙하지 않더라도 배가 고픈 관계로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잘 먹으면 장땡이지. 자, 우선 쨈을 바르고, 햄을 넣은 뒤, 쥐꼬리만 한 양의 샐러드와 감자튀김을 투덜거리며 넣은 다음, 우유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는, 입을 한껏 벌려 아~흡!


아! 맥도날드, 웬디스, 롯데리아, 아니 동네 구멍가게에서 만들어 파는 햄버거가 정말 그립다. 식빵 2개 중에 한 개라도 먹은 게 다행이야. 군대리아 수준은 정말 이거밖에 안 되는 걸까? 식판 한 구석에 하얗게 질린 채 풀이 죽은 듯 담겨있는 수프는 또 어떻고? 너무 맑아서 낚시를 드리우면 월척이 낚일 것만 같구먼.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새하얀 밥에 싱그런 내음이 번지는 우리 집 김치를 먹고 싶 - 꾸울 꺽 - 구나!


이어지는 순서는 목욕.

"자, 인원이 많은 관계로 목욕 시간을 무한정 줄 수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시간은 한 조당 3분, 3분입니다. 지금부터 한 줄씩 차례로 입장!"


목욕을 할 수 있는 게 어디야? 감지덕지지. 그런데, 목욕탕에 들어가서 비누칠을 하기가 무섭게 귓가를 울리는 고함소리.

"자, 목욕 끝. 밖으로 집합하는데 선착순 한 명! 뛰어!"


씻는 둥 마는 둥, 헐레벌떡 떼밀려 나올 수밖에. 아, 집이 그립다.


또 한 번의 신체검사.

벌써 더위가 찾아왔는지 팬티만 걸치고 앉아만 있는데도 땀이 흘러. 하긴, 몇 백 명이 한 곳에 몰려 앉았으니 그 열기가 오죽하겠어. 신체검사도 형식적이긴 서울이나 매한가지고 말이야. 그런데, 우리들 중에 명물이 하나 있더라고. 징집영장을 받고 논산으로 내려오기를 여덟 번이나 한 아저씨가 한 명 있는 거야. 두 번만 더 하면 완전 면제라나? 아무튼 용하다 용해.


다음은 인성검사장.

마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만든 데칼코마니를 연상시키는 화면을 보고 떠오르는 인상을 답안지에서 고르는 곳. 나야 워낙 심성이 곱고 인간성이 좋기로 유명한 사람이니 이런 것 하나 제대로 통과 못하겠어? 누워서 떡 먹기였지.


마지막 적성검사장.

사회경력, 학력, 자격증, 전공, 직업, 취미, 특기, 기술교육 여부 등등을 종합하여 임시로 주특기 분류를 하는 곳이야. 여기서 내가 받은 주특기는 뜻밖에도 '2'였어. 다름 아니라 전산병 주특기! 이거야 말로 내가 그토록 꿈꿔왔던 거지. 야호! 자, 이제 훈련만 끝나면 전산병으로 가는 거야. 기대하시라 개봉 박두!


(3) 훈련소를 향하여 1,000미터 전진


1991년 5월 2일(목). 대기병으로 어느덧 4일째.


또다시 집합. 이번엔 또 뭐야? 으잉? 연병장을 돌며 퇴소를 하는 이등병들의 면회 장소를 정리하라니. 어휴. 난 언제 면회를 할라나. 아직 훈련소로도 못 건너갔으니. 하지만 면회장을 돌며 청소를 하고 있자니 이등병들의 부모님이 양념 통닭이며 음료수며, 입대 후로는 구경조차 못했던 진수성찬을 조금씩 나누어 주는 거 있지. 당신들의 아들도 지금의 나와 같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서였겠지만, 정말 짭짤한(?) 시간이었어.


오후 4시경.

갑자기 막사에 있던 전 병력을 연병장으로 인솔. 소지품 - 입고 있는 군복 한 벌, 쓰고 있는 모자 한 개, 세면도구가 들어있는 작은 파우치 하나, 신고 있는 군화 한 족이 전부인 - 을 들고 나오라는 걸 봐서는 심상치 않은데.


스탠드에 열을 맞추어 앉아 있으려니 웬 사람들이 몰려오는 거야. 여기저기서 병력을 뽑아가는 차출이라는 거 있지. 보아하니 좋은 데만 뽑아가는 거 같으니 나도 손을 들어야겠지?


그런데, 이게 뭐람. 요리, 골프, 테니스? 볼링은 없나? 뭐, 태권도 2단 이상, 합기도, 우슈, 특공무술?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종목이니 패스. 키 180센티미터 이상? 콩나물 무침을 조금만 더 먹었어도... 운전면허? 진작에 시험을 볼 걸. 후회막심이네. 게다가, SKY 대학 출신? 무슨 항공대학이나 낙하산 훈련학과를 말하는 건가? 이럴 수가 군대까지 와서도 출신학교 차별이라니. 어쭈, 한 술 더 떠서 안경잡이는 무조건 탈락이네. 와~ 끓어 오른다.


밤 10시. 오늘도 어김없이 대기병으로 잠자리에 든다. 내일은 기필코!


1991년 5월 3일(금). 오후 3시경.

대기병 5일째의 태양도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려고 폼 잡을 즈음. 또다시 들리는 지긋지긋한 소리.


"모두 소지품 들고 1분 안으로 연병장 집합!"


어,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얼굴이 까무잡잡하다 못해 시커멓고, 눌러쓴 하이바에 가려진 그늘 때문에 눈동자만 유독 빛나 무시무시해 보이는 저들은... 그렇다! 바로 훈련소 조교들. 더 이상 얘기 하기 싫어. 정말 무지막지하게 생긴 일명 '천사' 소대장의 호명에 고함을 지르며 하나둘씩 달려 나간다. 맞기 싫으면 목이 터져라 질러야지 어떡해. 벌써 몇 녀석이 목소리가 작다고 모래밭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데. 공포의 시간. 주여, 도와주소서.


얼마를 굴렀는지도 기억나지 않아. 횡대로 섰다가 종대로 섰다가, 엎어졌다가 일어났다가, 걷다가 기다가, 오리걸음으로 갔다가 굴러갔다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어지러움과 메스꺼움. 훈련소를 고작 1000미터 앞에 두고 이 무슨 일이고. 아이고마 사람 죽네~.


"저기 보이는 노란 찻집

오늘은 그녀를 세 번째 만나는 날. (중략)

머릿속에 가득한 그녀 모습이 조금씩 내게 다가오는 것 같아~"

- 「그녀를 만나는 곳 100미터 전」/ 1990. 4. 1 발매 / 작사 노영심, 작곡 이남우, 노래 이상우 -


그래, 드디어 고달픈 훈련병의 나날이 시작된 거야. 1,000미터를 사이에 두고 천국에서의 5일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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