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군번 훈련병의 일기(5.황토 흙 속의 함성)

Episode 5: 소리 없는 아우성

by 행복상상

(6) 황토 흙 속의 함성


시뻘건 황토 흙의 각개전투 교장.

황색 먼지, 땀이 밴 군복에 묻어나는 핏빛 황토물. 오늘도 어김없이 빨래가 우릴 기다리겠군. 이런 생각도 잠깐, 높은 포복, 낮은 포복, 응용 포복, 약진 등등 자세를 바꾸며 바닥을 기어야 해.


앞사람들이 한 번 쓸고 간 후라 깔끔하게 쓸려간 돌들을 일부러 다시 깔아 놓고 굴리다니 이건 정말 비인도적이야. 살점이 나가고 무릎이 까져도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괴로움, 분노, 오기, 살기 어린 눈들. 그래, 군인이란 어차피 적을 죽여야 하지. 아니면 내가 죽으니까. 이 시간만 참자. 오늘이라는 해가 넘어가면 다시 따뜻한 눈들을 볼 수 있을 테니까.


넘어진 통나무를 돌아 나무등걸까지 응용 포복. 낮은 포복으로 덤불까지. 다시 약진으로 부서진 건물까지 이동.


"1분대 돌격 앞으로." "와아~"

함성을 울리며 문을 박차고 들어가 "탕탕". 벽에 붙은 후 수류탄 투척, "쾅". 하나 둘 셋을 세며 안으로 뛰어들어가 제압하고, 후면으로 돌진. "야~". 비록 효과음은 입으로 내지만 그럭저럭 재밌네.


하지만, 쨍쨍 내리쬐는 초여름의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하는 장애물 통과 훈련은 정말이지 싫어. 철조망과 담벼락 통과를 하노라면, 끊임없이 피어나는 먼지와 가빠오는 호흡, 입 안에서 씹히는 모래들이 괴롭히지. 코스도 단조로운데, 조금의 휴식도 없이 계속 반복되는 훈련에 몸은 기진맥진, 목은 말라비틀어져.


어찌어찌 훈련 시간이 끝나고,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달래며 덕지덕지 황토흙이 달라붙어 무거워진 군화를 옮기노라면 초췌해진 몰골이 장난 아니야. 저녁 무렵 정비시간에 깨끗이 흙을 털어내고 구두약을 먹이고 있자면, 광을 내는 일이 쓸모없는 일처럼 느껴져. 어차피 내일이면 땀과 먼지로 다시 얼룩질 테니까 말이야.


먼 옛날 아라비아 광야를 헤매던 이스라엘 민족의 고충을 이해할 것도 같아. 아니, 그 사람들이 더 좋은 조건이었어. 하나님이 햇볕을 가릴 구름기둥을 보내 주셨거든. 오오, 하나님. 저에게도 힘을 주소서.


(7) 별 헤는 밤


진지 구축과 야간 경계 교육.

오랜만에 쉬는 시간이 많아서 좋다. 과목의 성격상 이론 교육이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야. 역시 공기는 시골이 최고야.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야간 교육도 실시하는데, 밤하늘에 펼쳐진 별들이 쏟아져 내릴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하늘이 깨끗하거든.


"별 하나에 추억과 /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 별 하나에 동경과 (중략)"

- 「별 헤는 밤」 / 1948년 발표 / 지은이 윤동주 -


그렇다고 별구경만 한 건 아냐. 밤손님처럼 살금살금 이동하는 법과 조명탄 아래서 몸을 은폐하는 법, 적의 침투 시 퇴치하는 법 등을 연마하느라 나름 바빴다고. 흡사 전쟁놀이 같아서 재밌었어. 그나저나 빨래는 언제 하지?


(8) 썩으러 가는 길


저녁 식사 후, 중대장 교육 시간.

우리 중대를 거쳐 지금은 전역한 선임병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소개한다나 봐. 그런데 내용이 조금 이상하네.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데.


그럼 그렇지, 내 눈을 속일 순 없지. 그 편지는 1학년 때 교양 국어의 리포트로 베꼈었던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에 수록된 작품이었어. 비록 부르주아를 비난하는 내용도 들어있지만 군 생활에 도움이 될만한 내용이 많지. 중대장도 이런 이유에서 이 시를 읽어 주었던 거야. 정말 좋은 사람이야, 이럴 때만.


"싸나이로 태어나서 이제 군대를 가는구나.

한참 좋은 청춘을 썩으러 가는구나. (중략)

그대는 울면서 군대 3년을 썩으러 가는구나.

썩어 다시 꽃망울로 돌아올 날까지

열심히 썩어라.(후략)"

- 「썩으러 가는 길 (부제: 군대 가는 후배에게)」/ 1984년 발간 / 지은이 박노해 -


지난 주일 밤 예배 시간에, 고된 훈련을 이기지 못하고 번민하던 한 전우에게도 들려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중대가 다르니 아쉽네. 하지만 값진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주었으니 틀림없이 도움이 되었을 거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 이사야서 41장 10절 말씀 -


마침 목사임의 설교도 이 구절과 유사한 내용이어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굉장히 신중하더라고. 나중에 그 친구를 위해 기도해 주었더니 정말 고마워하지 뭐야.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말이야. 하나님께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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