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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ug 25. 2019

감정은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래야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가 보인다!

"감정 드러내지 마.
감정 조절 못하면 하수야, 하수!"


수많은 직장인들, 아니 거의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저들의 감정을 얼굴에 담아낸다.

"저는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해요. 얼굴에 다 드러나거든요."라고 말하지 않는 직장인은 거의 없다. 자신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상대방, 타인은 그것을 바로 알아차린다.


어느 회의에서 상대 부서와 의견 충돌을 벌이고는 울그락불그락한 얼굴로 자리에 와 앉은 적이 있다.

그 모습을 보고는 한 선배가 다짜고짜 말했다.


"감정 드러내지 마. 그러면 하수야 하수!"


하지만, 난 그 선배가 평소에 얼마나 감정에 취해 일을 처리하는지를 항상 봐왔다. 

물론, 그 선배가 아무리 감정 조절을 잘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상황에서 그와 같은 조언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불난 집에 석유를 끼얹는 것과 다름없다.


"감정, 조절할 수 있는 걸까?"


유관부서나 리더 등, 누군가가 나를 공격하거나 나에게 화를 낸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변연계에서 감정중추가 반응하게 되고 분노나 미움, 원망 등의 감정이 생겨난다. 이럴 경우 이성적인 사고나 판단을 담당하는 전두엽 부위보다는 감정을 통제하는 변연계의 작용에 의해 뇌가 움직이게 된다. 이렇게 되면 전두엽으로 가는 에너지는 줄고, 이성적 판단을 하는 전두엽의 기능은 저하되어 집중력 또는 판단 능력이 떨어지게 된다.


즉, 감정은 내가 만들고 없애고 할 것의 성질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뇌에서 일으키는 반응이자 본능이다. 쉬이 "성질 좀 죽이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한 심리학 실험에서 두 명의 여성에게 잔인하고 충격적인 장면을 담은 영상을 시청하게 했다.

이후, 그 두 사람들은 자신들이 본 영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사전에 연구팀은 한 명의 여성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최대한 무표정으로 이야기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표정을 최대한 숨기려 했던 여성의 혈압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것은, 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다른 여성의 혈압도 동반 상승했다는 것이다. 무언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려는 경우, 상대방도 이것을 알아차리고는 불안을 느낀다는 것이다.


감정을 숨길 수 있다는 자만을 해선 안된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해야 한다.


분노는 부정적 감정이 아니다!


우리는 '감정적으로 일한다'라는 말에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감정'을 주로 분노나 화로 치환한다. 그리고 그것은 '부정적 감정'이라 치부하기 일쑤다. 하지만 면밀히 보자면, '감정'은 분노뿐만 아니라 행복이나 기쁨 등의 것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니 혼자 최고 평가 등급을 받거나 인센티브를 받게 되어도 100%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긴 어렵단 뜻이다.


어찌 되었건 오해를 풀기 위해 '부정적 감정'으로 돌아가 보면, 직장이나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분노나 화는 '부정적 감정'이라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신장 위 부신에서는 위협의 순간에 '아드레날린'과 '노르아드레날린' 두 호르몬을 생성하게 되는데 잘 알다시피 이 두 호르몬은 롤러코스터를 탈 때나 짜릿한 쾌감을 맛볼 때도 나오는 호르몬이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두 호르몬은 '생존을 돕는 호르몬'이다.

인류 최초의 감정은 '공포'였다. 이는 생존을 위한 것으로, 원시 시대에 사람이 맹수와 마주하면 이성적인 생각보다는 '감정'의 작용으로 몸을 피했던 것. 이때, 생존을 위해 보다 빠르게 평소보다 더 강력한 슈퍼파워를 가지게 해주는 호르몬이 위에 언급한 '아드레날린'과 '노르아드레날린'이다. 


즉, 분노와 용기는 같은 호르몬의 작용이며 이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러니,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했을 때 왜 성질을 죽이지 못했을까를 자책할 필요가 없다.


감정, 조절하지 말고 알아차려야 한다.
그래야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가 보인다!


그러니, 이제는 감정을 조절하거나 성질을 죽일 수 있다는 자만을 버려야 한다.

살아온 나이만큼, 우리는 시행착오를 겪지 않았던가. 감정 그대로 표출했다가 얻은 손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가족과의 갈등. 직장에서의 난처함까지. 지금까지는 느끼는 감정에 그대로 반응하고 분노를 내뱉었다면, 이제는 그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쉽지 않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스스로의 과제다.


그렇다면, 사회생활에 피해를 줄 수 있는 감정을 느꼈을 때 이것을 어떻게 알아차려야 할까?


첫째, 메타인지 or 초자아의 활용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은 바로 전두엽으로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특히, 전두엽에는 고등인지(메타인지) 기능이 있는데, 이는 사람이 어떤 감정을 느끼거나 생각을 할 때 스스로 그러한 현상을 '자각'하는 것을 뜻한다. 즉, 나를 타자로 놓고 나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감정적인 변화를 마치 제 3자가 관찰하듯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이다. 나를 바라보는 CCTV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CCTV의 관점에서 나를 바라본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더불어, 프로이트가 말한 '이드'와 '에고', '초자아'로도 설명을 할 수 있다. 분노에 의해 사고를 치고 싶은 '이드'를 '초자아'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이다. 그러면 '에고'가 그 중간에 개입해 현실적인 절충안을 내놓을 수 있게 된다. 결국, 얼마나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글 도입부에서 한 선배가,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감정이 아닌 타인의 감정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둘째, 내 감정에 이름 붙이기


심리학에선 이를 '인지적 전환'이라 말한다.

나는 실제로 이 방법을 많이 쓴다. 연애 초기에 운전을 하다가 끼어드는 차가 있으면 나는 바로 욕을 했다. 이때,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 친구(현 아내)는 겁을 먹고 불안해했다. 나는 분명 끼어든 차에게 욕을 한 것인데, 감정은 전이되는 것이니만큼 다른 사람에게도 위협적으로 작용을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러한 몇 가지 상황을 추려서 '짜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했고, 이를 아내에게 설명을 했다. 즉, 험악한 욕을 하며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마음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 해서 지금은 내가 아무리 짜증을 내도, 아내는 긴장하지 않는다.

직장에서도 기분이 나쁘거나 화가 나면, 나는 노트에 내 마음의 형태를 적어 내려간다.


분노, 화, 부끄러움, 짜증, 미안함 등. 기쁜 감정이 들 때는 잘 하지 않는데,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감정이 들 땐 이 방법을 쓴다. 왜냐하면 아드레날린과 노르아드레날린이 내 몸에 독소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생명의 신비 호르몬' 저자는, 스트레스가 지속될 경우 이 두 아드레날린은 자연계에서 복어와 뱀의 독 다음으로 강력하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두통, 심장의 두근거림, 식은땀, 호흡곤란 및 발작 등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내 감정에 꼬리표를 달면 내 감정은 구체화가 된다.

감정의 것들이 이성적인 영역으로 넘어오게 되는 전환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첫 번째 방법인 메타인지를 통해 그 감정을 객관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셋째, 감정 그대로 표출하기


사실, 뭐니 뭐니 해도 감정은 그대로 표출하는 것이 제맛이다.

기쁨과 슬픔. 소리 지르며 환호하거나,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우는 것은 정신 건강에 정말 좋다. 사람은 그렇게 살아왔고, 그래야 한다. 하지만, 문명사회가 생겨나고 직장이라는 조직생활을 하게 되면서 우리네 사람은 감정을 법과 제도, 예절과 사회라는 감옥에 감금을 시킨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마음의 병을 달고 살게 된 것이다.


감정조절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스탠퍼드대 제임스 그로스(James Gross)도, 화가 나는 감정이 발생하기 전에 그러하지 않도록 상황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엔 메타인지와 더불어 감정을 억제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엔 그것을 그대로 표출하라고 안내한다.


하지만, 직장 내에서 우리가 분노는 물론이고 기쁨도 곧이곧대로 표출한다면 사회 부적응자가 될 것이 뻔하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만의 감정을 표출할 방법이나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보통 혼자 있는 차 안을 활용하는 편인데, 혼자 운전하다 소리를 치며 기뻐하거나 분노를 표출하는 것만큼 시원한 게 없다. 홀로 있는 산이나 바다에서 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현실적인 방법으로 최고다. 물론, 노래방에서 소리치며 노래를 하거나 달리기를 하며 땀을 빼는 것도 현대인이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니, 각자의 감정을 그대로 표출할 수 있는 방법과 장소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쉽게 누군가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거나, 성질 죽이라는 말을 한다.

이제는 무책임하게 그런 말을 던지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 누군가의 감정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은 오만과 편견이다. 대신,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객관화하고 분노의 감정이 올라왔을 때 한 발 떨어져 우리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올라오는 감정을 알아차리기만 해도 성공이라 말할 수 있다.


알아차리면, 그다음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는 것도 나를 지키는 일이지만, 직장에서 내 위치를 지켜야 하는 것도 나를 지키는 일이다. 나에게 생긴 감정이 이런 것이구나, 예전에 이런 감정이 생겼을 때 나는 어떻게 했었는데... 이번엔 어떻게 해야겠다를 부단히 연습해야 한다. 


생겨난 감정은 어쩔 수 없더라도 그 이후의 행동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기회다.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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