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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Sep 18. 2019

모든 직장인은 감정 노동자다.

나도 모르게 더 많이 노동한 나의 마음

"감정 노동자"


국가산업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되는 훈장. 동탑산업훈장.

4호선 경마공원역 1번 출구를 통해 30년째 출근하는, 한 경마장 발매직원 분께서 그 상을 받았다는 기사가 내 이목을 끌었다. 그분의 공적은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제도 마련에 큰 공을 세웠다는 것. '고객은 왕'이란 일방적이고도 위압적인 통념 속에서, 그분이 30년 간 겪은 왕의 폭력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기존 '고객 응대 지침서'에 '발매직원을 위한 보호 조치'도 반영할 수 있도록 피력을 한 것이다. 별도 휴게 공간을 마련하고, 악성 고객의 폭언이나 폭행 그리고 신체 접촉 시에는 회사에서 적극적으로 조치하는 것. 그러한 고객은 영구 퇴장이나 형사고발 저치 하되 폭언한 고객이 발매직원에게 사과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것까지 포함되었다. 결과는 놀라웠고 모든 직원이 웃으며 일할 수 있는 근무 환경이 구축되었다고 한다.


'노동'에 접목된 '감정'이라는 글자


사실, '감정노동'이라는 말은 그리 흔한 말이 아니었다.

그 두 단어가 그리 잘 어울리는 것도 아니다. '노동'의 사전적 뜻을 찾아보면 '몸을 움직여 일을 함'이라고 되어 있고, 우리가 흔히 그 단어를 떠올릴 때는 무언가에 열중하며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상상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감정'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무언가를 뻘뻘 흘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서비스의 본질을 착각한 일부 갑질에 능한(?)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사회적 이슈가 되었고, 마침내 '감정 노동'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상대방 위로 군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그들의 철없는 생각과 행동은 얼굴 표정을 바꿀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무던히도 헤집어 놓아 만들어진 그 단어의 무게감은 상당하다. 


재밌는 것은,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 말의 탄생을 격하게 반긴다는 것이다.

그간 우리는 '노동'과 '감정'은 별개라고 생각해왔다는 말이 되는데, 그것은 참으로 소스라치게 들린다. 로봇도 아니고, 무생물이 아닌 사람이 일을 하는데 감정이 개입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1914년 탄생한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스'를 보면 그것이 더 명확하다.

기계라는 반복적인 상징물을 내세워 '노동'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모습이 이어진다. 식사 시간을 아끼기 위해 노동자에게 밥을 먹여주는 기계를 실험하는 장면까지 나오는 걸 보면 '노동'에 과연 '감정'이 개입될까 싶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러한 과정을 거쳐 '감정'이 망가진다. 나사와 비슷하게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무의식적으로 조이려 하는 장면은 웃음과 동시에 내 마음을 돌아보게 한다.


산업화와 동시에, 결국 '감정노동'이라는 단어가 탄생할 것이라는 것을 찰리 채플린은 예견한 것이 아닐까.

"산업화된 현대 기계문명 속에서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성에 관한 이야기"란 자막으로 시작된 프롤로그가 격하게 노골적으로 보이는 이유다.

찰리 채플린은 웃고 있고, 남들을 웃게 하지만 감정노동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비판한다.


모든 직장인은 감정 노동자다!


반대로 이야기해보자면, 감정 노동을 하지 않는 직장인은 없다.

세 번째 저서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의 한 꼭지인 '변검술사'에서도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직장인인 우리는 출근할 때 수 십 개의 가면을 들고 출근하며, 변검술사와 같이 사람과 상황에 따라 재빨리 가면을 바꿔채야 한다. 그 가면 뒤에는 여지없이 우리의 '감정'이 숨어 있다. 가면의 표정과 감정의 표정이 다를 때, 직장인인 우리는 고뇌하고, 조금은 슬프게도 대부분 그 둘의 표정은 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진다. 인지부조화를 겪을 때 사람은 지친다. 마음이 불편하니까. 정체성에 혼란이 오고, 가식적인 자신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에. 그러한 마음을 마음껏 표출하거나 폭발시키지 못해 직장인은 언제나 불안하고 불편하다.


그러니, 이제부터 좀 더 심도 있게 고민해봐야 할 것이 있다.

노동을 하는 육체는 그래도 주말엔 쉰다는 것. 하지만 우리네 감정은 주중이나 주말의 경계가 없다.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해고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과 온종일 투닥거려야 하는 현실에서 감정은 요동하지 않을 수 없고 멈출 수가 없으니. 마음 불편한 채로 퇴근을 했다면, 끝나지 않은 일이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 있다면 몸은 집에 있어도, 해변가에 있어도 우리는 노동을 이어가고 있다는 걸 주시해야 한다.


사실, 직장에서 하는 일들은 다 고만고만하다.

보고를 잘하거나, 엑셀을 잘 다루거나, 경영을 하거나. 뭔가 크게 달라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아마도 감정을 잘 다루는 사람이 좀 더 오래가지 않을까 한다는 것. 겉으로 드러난 노동이 고만고만하다면,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감정이란 생각이다. 그 감정이라는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좀 더 잘 버틸 수 있지 않을까.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명제가 통하는 직장이라면 분명 더 그렇다고 본다.


직장인에게 심리학이 필요한 이유다.

학문이 아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 나와 대화할 수 있는 기회. 내 마음을 돌아보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관용. 그리고 의식적 주말을 누릴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하기 위해서 말이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반응에 반응하지 않고, 그 너머의 본질을 볼 때. 심리학은 그 과정을 돕는다.


노동으로 지친 몸에 운동과 영양제가 필요하듯이, 이젠 나의 마음도 함께 돌아보는 관점과 시간이 필요하다.

나도 모르게 더 많이 노동한, 내 마음 그리고 감정을 위해.




P.S

오늘 하루도, '감정노동'하느라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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