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출간한 책들이 잘 있는지, 그리고 요즘 책들은 무얼 말하고 싶은지 알고 싶은 마음과 함께. 더불어, 평소라면 근무를 했어야 하는 시간에 서점에 와 책을 읽는다는 건, 먹고 사느라 묶여 있는 것들로부터의 해방이자 카타르시스 그 자체다.
에세이 코너엔 신간이 가득하다.
누구나 작가가 되고, 나의 이야기가 팔리는 시대.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찬성한다. 나 또한 그 수혜자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상을 달리 보고, 그것의 깨달음을 전하는 사명은 삶의 어느 순간에 맞이한 형용할 수 없는 즐거움이다. 아메리카노 한 잔 시켜 놓고 올라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써 내리는 에세이도 있지만, 나는 그 결이 좀 다르다. 에세이의 무게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글, 어떠한 무게에서 감동을 받느냐는 오롯이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여러 에세이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곳엔 나를 사랑하는 법, 나에게 멋대로 하는 사람에게 대응하는 법 등 인간관계에 대한 것이 주를 이루었다. 대부분의 상처는 사람에서 오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든 자신만의 삶을 살아야 하고, 열심히 살기보단 자신의 마음을 보듬으란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읽는 내내 공감과 위로를 받았다.
그러나,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
예전 어느 음료 광고가 말한 2%의 부족함. 끝내는 그 어떤 공허함.
그제야 알았다.
아차. 나는 중년이지. 2%의 차이는 그것으로부터였다.
중년의 에세이는 달라야 한다.
이미 나는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고, 먹고사는 것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나만을 위해) 나대로 살기엔 이미 늦었고, 하마터면 열심히 안 살 뻔한 나를 추슬러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나를 후회하지 않는다.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후회보다는 내가 선택한 것을 더 소중히 여기는 법은, 중년이 내게 준 선물이다.
이 선물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흔들림, 고뇌, 방황, 외로움과 꽤 무거운 숙명에 대한 원망을 지나치고는 글쓰기와 함께 찾아온 아주 귀한 손님과 같이 내게 왔다. 그러니까, 내 맘대로만 살지 못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해서 내가 '나'가 아닌 건 아니란 것이다.
그 삶 속에 내가 있고, 내가 곧 그 삶이며 흔들림 속에서 내가 선택한 무게와 함께 나는 중심을 잡아간다.
'자아'를 찾아간다고 해서 마냥 이기적이 될 필요는 없다.
나는 '선한 이기주의'를 지향하는데, 이것은 나를 챙기되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남의 눈치는 보지 말되 남을 배려하자는 생각을 근간으로 한다.
중년의 에세이는 응당 나와 바깥을 두루 살펴야 한다.
때로는 나를 내려놓는, 때로는 나에게 멋대로 대하는 사람을 포용하는,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 와중에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원망보다는, 내가 준 상처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진 않는지 돌아보는 여유와 깨달음. 이미 어쩔 수 없는 먹고사는 고단함은 있겠지만, 중년이 나이 들어 아름다운 건 인생의 중간 항로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일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