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한 시각에 집에서 빵 반죽을 만들고 있다. 범인은 아빠. 내일 아침으로 달걀물 입혀 구울 식빵을 온종일 기다렸는데, 엄마가 빈손으로 돌아온 것이다. 크게 상심한 아빠 곁에는 마침 빵을 구울 줄 아는 내가 있었고 (제빵기능사 필기 보유자, 실기는 3전 3패 경력 보유자) 글이 써지지 않아서 씩씩거리고 있던 나는 이 울화를 반죽에 마음껏 쏟아놓기로 했다.
나는 반죽을 있는 힘껏 패대기치는 순간을 맛보기 위해 빵을 굽는다. 베이킹은 무언가를 후려치고 싶어 손이 근질거리는 사람이나, 다 때려치우고 침대로 들어가 목놓아 울고 싶은 사람에게 알맞은 취미다. 온갖 가루와 액체가 섞여 반죽이 되는 마법을 바라보는 동안 우울과 걱정은 잊혀지고, 그것을 그릇 바닥에 마구 패대기치다 보면 여남은 근심조차 목덜미에 배어나온 땀에 녹아 사라진다. 빵을 만드는 동안은 온 세상이 눈앞의 반죽 한 덩어리로 축소되는 경험을 하니, 빵 명상*이라는 단어가 괜히 존재하는 게 아닌 것이다.
성과가 나오지 않는 일에 오래 매달려 다 놓아버리고 싶은 사람, 친구들과 만나면 새로운 근황이 없어 절절매는 사람에게도 빵 만들기는 특효다. 나의 경우, 버터가 듬뿍 들어간 빵을 결대로 죽 찢으며 행복해하는 언니의 얼굴을 보면 반죽하느라 너덜너덜해진 팔에도 새로운 힘이 솟구치는 걸 느낀다. 도무지 진척되지 않는 일도 힘내서 다시 한번 마주볼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친구들이 전부 직장을 다니느라 얼굴을 많이 보지 못하는데, sns에 올린 사진을 보고 먹고 싶다며 ‘빵 모임’을 개최하자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빵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자퇴 후 제빵학원에 다니던 시절,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자책으로 몸부림칠 때도 달아오른 오븐에서 새어나오는 고소한 냄새를 맡으면 미소가 지어졌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씁쓸해도 언제나 한 점의 단맛은 남아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냄새였다. 너무 많이 구워 주변에 종종 나눠주기도 했는데, 봉지에 담긴 빵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기처럼 순진무구한 미소를 짓곤 했다.
그러니 인생에 대한 의심이 그치지 않을 때, 모든 것이 허탈하고 쓸모없게만 느껴질 때,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가라. 강력분과 버터, 저울을 사고 바보도 할 수 있다고 알려진 초보자용 레시피를 찾아라. 필요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정확히 계량하겠다는 마음가짐, 재료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인내심뿐이다. 단, 만들기 전 발효시간은 미리 알아두는 편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꼼짝없이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니까. 빵을 먹고 싶다던 아빠가 코를 골며 잠든 밤, 식구들이 모두 잠든 이 야심한 시각에 말이다.
* 빵 명상 : 빵을 만들거나 먹는 행위를 통해 마음을 집중하고, 현재에 머물러 감각을 느끼는 명상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