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뒷걸음질로 산딸기 잡기

by 별밤

우리 아파트 단지에는 아침마다 야채 장수가 온다. 꿀토마토나 햇사과 따위 플래카드를 걸고 정해진 품목 몇 점만을 파는 트럭을 상상해서는 곤란하다. 무우, 가지, 연근, 오이, 고구마, 늙은호박, 애호박, 사과, 배, 참외, 토마토… 기나긴 시장거리 한 폭을 뚝 잘라 솜씨 좋게 트럭 짐칸에 부려 오는 것처럼 취급하는 종목이 다종다양하다. 집앞 마트보다 훨씬 알차고 싱싱하고 가격 또한 저렴해서 늘 문전성시를 이루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야채 아저씨는 귀 밝은 언니의 단잠을 방해하는 원수지간인 한편 게으른 나를 아침산보 나가게 만드는 일급 트레이너다. 엄마의 지령을 받아서이기도 하지만 과연 오늘은 무슨 알토란 같은 물건을 가져오셨을까 기대가 되어 달려나가지 않을 수 없다. 한번은 고구마를 사러 나섰다가 골드키위가 박스째 쌓여 있는 걸 목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 혼자 전부 먹어치울 자신도 없고, 결정적으로 42500원이라는 가격이 기를 팍 죽이는 바람에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그 뒤로 한동안 내 머릿속에선 키위가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눈썰미 좋은 아저씨가 파는 키위는 얼마나 알이 굵고 즙이 많고 달콤할 것인가. 상상만으로 입속에 침이 가득 고이는 기분이었다. 같은 처지의 아주머니 한 분을 꼬시면 비교적 부담 덜하게 키위를 모셔올 수 있다는 계획도 만들어 놓았다.



그렇게 마음은 굳게 먹었지만 아저씨를 다시 만나기란 썩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해가 밝을 때 바깥에 나가는 것에 심한 저항감이 있다. 남들이 햇볕의 밝음과 따사로움에 충전되는 기분을 느낀다면, 나는 역으로 기가 쭉쭉 빨려나가는 기분을 느낀다. 태양의 복사열이 한꺼풀 식고 공기가 시원해진 다음에야 돌아다닐 용기가 생긴다. 낮에 외출할 수 있을 때는 딱 두 가지, 세탁소 40퍼센트 할인 때문에 억지로 나가야 할 때나, 언니를 꼬셔서 함께 나갈 때뿐이다.



며칠을 머뭇거리다가 언니가 커피를 사러 나갈 때를 놓치지 않고 따라나섰다. 시각은 10시 반. 트럭은 아홉시에 도착하고, 오자마자 주부들로 진을 치듯이 둘러싸인다. 웬만한 물건은 다 털렸을 확률이 높다. 그래도 골드키위는 일반 가정에 친근한 품목이 아니니까, 약간의 가능성은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



멀리서 보이는 트럭의 모습에 탄식부터 나왔다. 빈 박스들이 트럭 주변에 차곡차곡 개어 접혀 있다. 평소의 북새통은 상상할 수 없이 휑한 가운데 아주머니 두엇이 트럭에 탄 아저씨한테 값을 치르는 모양새다. 가까이 다가가자 보이는 건 얼마간의 감자, 양파, 고구마뿐. 혹시 몰라 물었더니, “키위? 없어요, 없어. 다 나갔어.” 하는 매정한 대답이 돌아온다.



깊은 한숨으로 양 어깨가 축 처지려던 그때, 값을 치르던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를 휙 돌아본다. “산딸기 사!” 그러고는 묵직한 봉지를 치켜올린다. 납작한 하얀 스티로폼 박스가 세 상자나 담겨 있다.



“한 박스에 칠천 원이야. 알도 큼지막하고. 안 사면 바보다!”



그러고는 소녀처럼 까르르 웃으신다. 제철이 아닐 때에도 일정한 수확량을 보장하는 배나 사과와 달리 산딸기는 5월 말에서 6월 사이에 반짝 등장하는 과일이다. 그리 대중적이지 않은 품목인데다 저장도 오래가지 않아 찾을 생각을 못했는데, 유레카! 부력을 발견한 아르키메데스의 심경이 이런 것일까. 당장 두 박스를 사서 발걸음도 가볍고 신명 나게 집으로 돌아왔다.



산딸기는 마트나 아무 과일가게에서 사는 것보다 엄선된 농장에서 갓 따낸 것이 월등히 맛있는 과일이다. 너무 작아서 씹을 것도 없는 과일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 진정한 산딸기를 맛보지 못한 것이다. 목욕탕이나 직장 동료들 사이에 국산 깨로 짠 ‘참기름 카르텔’이 존재하듯, 믿음직한 농원에서 금방 딴 ‘산딸기 카르텔’도 암암리에 존재하니 참고하기를 바란다.



오래 보관하여 냉장고 맛이 나는 쪼그라든 산딸기와 달리 갓 수확한 산딸기는 알이 굵고 통통하며 달콤한 향기가 난다. 목욕탕에서 막 받아든 스티로폼 상자의 뚜껑을 열고 소복이 쌓인 산딸기 위로 코끝을 가져다 대 보라. 그리고 아직 햇살을 머금고 있는 열매를 아기 목욕시키듯이 흐르는 물에 살살 굴렸다가 입에 넣어 보라. 향기 그 자체를 농축시킨 듯한 맛! 풋풋하고 살짝 배릿하고 새콤달콤한 봄이 입안에서 터지는 걸 느낄 수 있다.



“맛있어?”

“응.”

“그 아줌마 덕분에 땡잡았다, 그치. 골드키위 못 산 건 아쉽지만.”

“괜찮아.”

“정말?”



물론이다. 골드키위는 팩에 담아서 파는 걸 언제라도 살 수 있지만, 제철 산딸기는 딱 지금 이 순간에만 먹을 수 있으니까. 갓 수확한 산딸기 속에는 정성을 담은 기름진 땅, 아낌없이 쏟아부은 햇빛이 담겨 있다. 제아무리 억압하고 짓눌러도 부수어지지 않는 질긴 생명력이 넘치도록 담겨 있다. 먹으면 먹을수록 힘이 난다.



더위 때문에 몸이 축축 늘어진다면, 갑자기 성큼 다가온 여름이 부담스럽다면, 물에 씻은 산딸기 한 줌을 입에 넣어 보라. 톡톡, 씨앗이 잇새에서 경쾌하게 씹힌다. 지나간 봄의 꽃망울이 몸속에서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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