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식생활이 많이 망가졌다. 베이킹을 시작하면서 밀가루 먹는 빈도가 훅 늘었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꾸 와플이니 스무디니 하는 배달음식을 시키게 된다. 어쩌다 밥을 먹더라도 인터넷으로 산 양념게장에 김가루와 밥을 비벼 먹거나, 포장된 고기를 구워 먹거나, 계란말이와 김치만으로 밥을 먹는 식이다.
이런 음식을 계속 먹게 되면 몸은 편할지 몰라도 마음은 점점 불편해진다. 아니, 영혼이 불편해진다고 말하는 게 옳은지도 모른다. 바람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갈대잎처럼 차츰차츰 불안하고 초조한 심경이 된다. 누군가가 정성들여 키우고 길러낸 것, 오랜 시간 약한 불에 끓이고 마음을 담아 무쳐낸 것을 간절히 먹고 싶어진다.
맵고 짜고 자극적이지 않은 것, 슴슴하면서도 정성이 담겨 있는 건강한 음식을 갈망하는 마음은 색색깔의 나물과 윤기가 흐르는 밥으로 뭉쳐진다. 따뜻이 데운 그릇에 김이 피어오르는 밥이 담기고, 시금치, 콩나물, 고사리, 무나물 등 소박하지만 다양한 색채의 나물들이 그 위를 감싼다. 계란 프라이를 올려도 좋지만 생략해도 무방하다. 미지근한 콩나물국 한 사발을 곁들이면 좋겠지만 없어도 잡혀가진 않는다. 밥과 나물. 비빔밥의 요건은 그 두 가지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비빔밥은 초라하면서도 화려한 음식이다. 멋들어진 한정식집 차림표와 가난한 자취생의 밥상에 공평히 오른다. 온통 채소뿐이지만 아무도 그 앞에서 감히 대접이 형편없다 말하지 못한다. “남는 나물에 밥 좀 넣고 비벼먹지, 뭐.” 이런 말이 심심찮게 나오는 걸 보면 은근히 만만한 음식인 것도 같다.
하지만 밥 위에 올릴 나물 하나하나를 준비하는 일은 결코 간단치 않다. 껍질 벗기고 다듬고 아린 맛 빼내고 끓는 물에 오래 데치고 간하고… 밑반찬으로 나올 만큼 널리고 흔해 빠졌지만 생각보다 훨씬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 바로 나물이다.
만일 비빔밥에 올려 먹을 나물이 냉장고에 쌓여 있다면 누군가가 나를 위해 그걸 해놨다는 뜻이고, 맵싹하고 강퍅한 채소를 끓는 물로 고문하여 순하고 다정한 반찬으로 바꾸어 놓는 지난한 과정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축복을 받았음에도 우리는 자주 자포자기한 채 남은 나물을 꺼낸다. 직장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거나, 친구와 싸웠거나, 하루종일 집안일에 시달려 너덜너덜한 몸으로 밥 차릴 기운이 없어서 비빔밥이란 메뉴를 선택한다. 데운 밥에 나물과 고추장을 넣고 힘껏 비비는 손에는 이따금 오기도 섞인다. 양푼이 미운 상대의 상판이라도 되는 양 전투적으로 마구 섞는다.
어쩌면 너무 열심히 비볐을지도 모른다. 식탁으로 갈 힘도 없어 선 채로 한숟갈 입에 넣는다. 한 입, 두 입, 축 늘어진 손목으로 힘없이 밀어넣던 숟가락이 차츰 빨라진다. 가라앉아 있던 눈빛에도 서서히 활력이 감돈다. 이 절묘한 맛! 덤덤하고 슴슴하지만 끝없이 입에 밀어넣게 되는 이 감칠맛을 도대체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오래 데쳐 숨이 죽은 나물은 세상살이에 거칠어진 미뢰를 포근하게 감싸고, 고추장의 맵싹함과 참기름의 고소함과 아삭거리는 식감이 축 늘어진 정신을 반짝 일깨운다. 삶에 이골이 난 할머니의 손맛처럼 덤덤하고 슴슴하고 묘하게 먹먹한 맛이 온몸 구석구석 스며들어 에너지를 만든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맛있는 음식 한 그릇에 금방 잊혀진다고, 다 먹고 힘내서 다시 한번 살아보라고, 보이지 않는 주름진 손길로 그렇게 다독이는 것만 같다.
이미 만들어진 나물을 꺼내서 비빔밥을 만드는 일은 쉬워 보일지 몰라도 엄연한 요리이다. 나물의 고소한 깨소금 냄새와 밥 냄새, 고소한 참기름 냄새를 맡으며 서서히 식욕을 깨운다. 어떤 나물을 많이 넣고 적게 넣을지, 고추장과 참기름과 간장은 얼마나 넣을지, 신중하게 고민하며 배합한다. 콧김을 내뿜으며 힘차게 썩썩 비비면 쌓인 스트레스까지 말끔히 날아가는 걸 느낄 수 있다.
코로나 이후 우리 사회에서 배달이 차지하는 빈도가 늘면서 직접 해먹는 요리의 빈도는 줄었다. 배달과 냉동식품은 물론 간편하지만 몸에도 좋지 않고 자극적이다. 식사 때마다 플라스틱과 비닐 쓰레기가 배출되는 게 당연해져버린 현실을 살다 보면, 채소를 직접 만지며 나물을 만드는 긴 공정이 치유의 과정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내가 먹을 음식을 직접 만드는 일은 스스로의 수고를 치하하며 대접하는 일이고, 나에게 그럴 가치가 있다고 믿게 만드는 일이다.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번 주말에는 야채칸에 숨어 있는 무와 시금치를 꺼내서 비빔밥에 얹어 먹을 나물을 만들어야겠다. 엄마에게 우리 집 나물 레시피를 가르쳐 달라고 해야지. 잦은 배달음식으로 황폐해진 속을 말끔히 씻어내고, 간편함만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최선이 아님을 곱씹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