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이 나도 맛있는 카레

by 별밤

우선 양파가 아주 많아야 한다. 큼지막한 것 하나 반에서 두 개 정도. 흘러나온 코를 들이키고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며 그것들을 전부 다진다. 꾹꾹 억누른 슬픔이 있다면 함께 내보내도 좋다. 다진 양파에 버터 한 덩이를 얹어 약불에 올린 뒤 당근과 감자 껍질을 벗긴다. 당근의 물기 많고 향긋한 즙과 감자의 순박하고 은은한 속살을 은근히 만끽하면서 작은 큐브 형태로 썰어주면 된다.



양파는 그러고도 한참 더 기다려야 한다. 어차피 기다려야 한다면 즐기는 게 낫다. 주방에 그윽하게 퍼지는 버터 향기를 맡으며, 속으로 유행이 한참 지난 노래를 부르며, 하얗고 투명하던 야채가 캐러맬 색으로 변하는 광경을 흥미롭게 구경하며 이따금 눌어붙지 않게 저어준다. 맵고 아삭아삭하고 기세등등하던 양파가 한 줌으로 졸아들어 달콤하게 변하면 카레 만들기는 거의 다 끝난 거나 다름없다. 살얼음이 녹아가고 있는 돼지고기와 물과 야채를 때려 넣고 약간 매운맛 카레가루를 섞어주면 끝. 그 뒤는 만인의 해결사인 시간이 알아서 해 줄 것이다.



이게 바로 돌아서면 배고프던 시절 내 주린 배를 채워주던 우리 집 카레 레시피다. 아침에 카레 냄새가 나면 잠기운 묻은 눈으로도 싱글벙글하며 교복을 걸쳤다. 뜨거운 카레보다는 한꺼풀 식어 소스처럼 걸쭉해진 카레가 내 입맛에 맞았다. 학교에서 고군분투 후 귀가하면 카레는 딱 알맞게 식어 있었고, 가방을 채 벗기도 전에 부랴부랴 속이 깊은 사발에다 밥을 푸고-진밥임은 이제 다들 말하지 않아도 아실 것이다-그 위로 미지근한 카레를 듬뿍 끼얹곤 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계란을 부쳤다. 허기가 육체를 점령한 날이면 계란이 익는 동안 부엌에 서서 교복 차림 그대로 몇 숟가락이고 입에 밀어넣기도 했다.



하지만 급식으로 카레가 나오는 건 다른 얘기였다. 형광물질처럼 샛노란 색깔부터가 먹기도 전에 식욕을 떨어뜨려 놓았고, 퍼석퍼석한 닭가슴살은 고기가 가진 어떤 감동도 주지 못한 채 종이처럼 입안에서 부스러졌다. 거기다 내가 싫어하는 피망이나 파프리카가 들어가기라도 하면… 으윽. 그건 카레의 격을 밑바닥까지 추락시켜 놓는 엉터리이고, 원조에 대한 예우 없는 모조품이었다. 기름 붙은 돼지고기와 양파로 흐물흐물한 단맛을 내고, 자박자박한 감자와 당근이 하나로 뭉그러지는 카레. 엄마의 손에서 탄생한 하나뿐인 카레만이 나의 열렬한 숭배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그날도 나는 홀로 식탁에 앉아 있었다. 의자 아래로 대롱거리는 발 옆에 무거운 가방이 아무렇게나 엎어져 있고, 한쪽 벽면을 바른 유리창으로는 사위어가는 햇볕과 까륵거리는 아이들 웃음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식탁에 얼굴을 박은 채 전투적으로 카레를 퍼먹었다. 급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도 먹는 둥 마는 둥, 오직 이 한 사발만을 위해 오늘 하루를 버텼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바로 그때였다. 머리 위에 매달린 원뿔 모양 등이 춤추듯 진동하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원목을 베어 만들어 묵직한 식탁도 드드득 움직였다. 며칠 전에 똑같은 현상을 겪었기에 곧바로 내가 지진의 한가운데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 동안 수십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영어 과외 선생님이 식탁의 나뭇결을 쓰다듬으며 감탄하시던 것도 떠올랐다. 이야, 너희 집은 무슨 일 생기면 이 밑으로 숨으면 되겠구나.



허리를 굽혀 식탁 아래로 몸을 밀어넣어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가련하게 떨고 있는 카레 한 사발이었다. 아직 세 숟가락 정도밖에 먹지 않은, 진한 계란 반숙이 눈물처럼 흘러내린 카레 한 그릇. 나는 가타부타 생각할 것도 없이 양팔로 그릇을 감싸 안았다. 둔중한 성벽이 성 안의 백성들을 지키듯, 견고한 두 팔로 카레를 둘러안은 채 여진이 끝날 때까지 똑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퇴색되거나 부풀려진다. 젊은 시절 영웅담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들 중에 양념을 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속에 슬쩍 끼어들어 나 역시 별것 아니라는 듯한 얼굴로 운을 떼어보고 싶다. 가진 것이라곤 식욕밖에 없던 시절, 자연에 맞서 카레 한 그릇을 지킨 순간이 있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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