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 계약서만 봐도 머리 아픈 당신에게

- 실무에서 필요한 법적 사고법

by 송송


내게 법은 정말 외계어였다

이과생인 제가 법을 처음 접했을 때의 당혹감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甲이 乙과 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정당한 사유 없이 이행을 거부하는 경우, 민법 제390조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을 부담한다...” 이 문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익숙한 단어로 구성되어 있지만, 의미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런데 법학을 공부한 친구들은 이 문장을 보고 곧바로 “채무불이행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을 떠올립니다. 이어서 정당한 사유의 존재 여부, 채무자의 귀책사유, 손해의 발생 및 그 범위 같은 것들을 검토하게 되겠죠.

간단한 글인데도 왜 나는 이해가 어려웠을까요?


갑·을·병·정 같은 비현실적인 호칭, 우회적으로 말하는 문장 구조, 직관적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상황 설정. 법은 왜 이토록 장황하고 복잡할까요? 그 이유는, 법이 ‘정답’을 알려주는 매뉴얼이 아니라 복잡한 현실을 구조화하기 위한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사회는 수많은 이해관계와 예외로 얽혀 있으며, 단일한 문장으로는 이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법은 그 다양성을 감당하기 위해 복잡한 언어 체계를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글인데 왜 다르게 읽힐까


회사에서 계약서를 받으면 대체로 법무팀에 검토를 요청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 않나요. 같은 한글로 쓰인 문서인데, 왜 우리는 혼자서 온전히 해석하지 못할까요?

예를 들어, "양 당사자는 상호 협의하여 본 계약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노력한다"는 조항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상호 협력하여 목적 달성을 위해 노력한다는 긍정적인 의지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분쟁 시 책임 소재를 흐리는 모호한 표현입니다. 협의란 어느 정도까지를 의미하는지, ‘노력’의 구체적 수준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실효성이 떨어집니다.

실제로 "협의가 안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일방의 해석이 합리적인지 판단할 기준은 무엇인가?"가 문제가 됩니다. 협의가 안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법률가는 같은 문장을 읽더라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단어 하나에도 명확한 정의가 있다고 전제하며, 예외 상황과 적용 맥락을 동시에 고려합니다. 예컨대, "계약을 체결한다"는 문장은 일상어로는 단순한 ‘약속’을 의미하겠지만, 법적 관점에서는 구속력 있는 의무관계의 성립을 의미합니다.

법률가의 독해는 항상 조건과 예외, 쟁점을 동시에 생각하는 방향으로 훈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ChatGPT 시대에도 여전히 필요한 이유


“이제 AI가 다 해주지 않나요?”라는 질문을 자주 듣습니다. 실제로 ChatGPT나 Copilot 같은 생성형 AI는 꽤 신뢰도 높은 일반론적 답변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일반론이 아닌 ‘내 상황’에 대한 해석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법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판례가 등장하고, 법령이 개정되며, 동일한 문장도 해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AI는 과거 데이터를 바탕으로 답변하지만, 변화의 흐름과 현실의 미묘한 맥락을 읽어내는 판단은 여전히 인간의 몫입니다.

기계는 규칙을 ‘적용’할 수 있지만, 규칙의 ‘취지’를 해석하고, 예외를 고려하며, 전체 맥락 속에서 합리적인 선택지를 고르는 일은 사람의 역할입니다.



리걸마인드는 사고방식이다


리걸마인드는 법조문을 암기하는 기술이 아니라, 법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입니다. 복잡한 현실을 법이라는 도구로 구조화하고, 예측 가능한 판단을 내려 실수를 줄이는 전략적 사고법입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사실관계를 명확히 정리하고, 적용 가능한 규정을 찾으며, 예외 상황과 반론 가능성까지 검토합니다. 상대방의 입장도 동시에 시뮬레이션하며, 반박 가능성까지 예측해 탄탄한 논리를 구성합니다.

리걸마인드는 결국, 불확실한 상황에서 침착하게 정답에 가까운 판단을 할 수 있는 사고의 틀을 만들어 줍니다. “내 생각에는”보다는 “법령에 따르면”, “보통은 그렇던데”보다는 “판례에 의하면”이라는 방식으로 근거 기반의 사고를 가능하게 합니다.



일상에서도 작동하는 사고의 도구


리걸마인드는 전문 법무 영역을 넘어, 일상과 실무에도 응용됩니다. 계약서를 검토할 때 모호한 표현은 없는지, 분쟁 시 어떻게 해석될지를 예측하는 것도 리걸마인드입니다. 회사 규정을 적용할 때 그 규정의 취지, 예외 상황, 다른 규정과의 충돌 여부를 함께 검토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협상에서도 리걸마인드는 유용합니다. 상대방의 숨은 의도를 추론하고, 내 제안의 약점은 무엇이며, 합의가 지켜지지 않을 경우 어떤 리스크가 발생하는지를 미리 고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법은 절대적인 한 줄 문장이 아니라, 전체 구조와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갖는 유기적인 시스템입니다. 기업의 규정과 정책도 마찬가지입니다. 규정의 ‘글자’만 보는 것이 아니라, ‘취지’와 ‘맥락’을 읽어야 진짜 실수를 줄일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힘이 경쟁력이다


AI는 이제 많은 일을 대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시대일수록 판단력과 사고력의 격차가 더 중요한 경쟁력이 됩니다. 결국 마지막 판단은 사람이 내리기 때문입니다.

법률가의 사고방식은 법조문을 얼마나 많이 외우느냐가 아니라, 그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기준으로 적용할지를 판단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모든 지식노동자, 특히 복잡한 상황에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실무자에게도 필수적인 역량입니다.


변호사가 아니어도 법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리걸마인드는 변호사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복잡한 현실에서 보다 정교하게 사고하고, 명확하게 설명하며, 실수를 줄이는 기술입니다. 법을 외울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법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은 배워둘 만한 가치가 충분합니다.



keyword
이전 10화Ep.27. 내용증명을 받았을때 가장 먼저 할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