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고
동창회장 입구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니 낯익은 얼굴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회색 양복, 약간 구부정한 어깨, 그 특유의 걸음걸이까지 낯설지 않은데, 이름이 목구멍 어디쯤에서 걸렸다.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야, 오랜만이다." 나는 이름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양복 천의 까끌한 촉감이 손끝에 남았다. 그가 웃으며 뭔가 말했지만, 내게는 내 심장 소리만 들렸다. 40년을 함께한 사람의 이름을, 나는 정말 모르고 있었다.
화장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숨을 골랐다. 세면대 거울 속 내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물을 틀었다. 차가운 물줄기가 손목을 타고 흘렀지만, 떠오르지 않는 그 이름은 여전히 입천장 어딘가에 붙어 있었다. 예순을 앞둔 지금, 이런 순간들이 잦아진다. 대학 시절 격렬했던 감정은 선명하지만, 구체적인 장면은 희미하다. 누가 옆에 있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은 늘 구멍 난 그물처럼 나를 찾아온다.
퇴직한 지 석 달쯤 됐을 때였다. 은행에서 대출 상담을 받는데, 직원이 서류를 건네며 물었다. "현재 직장란에 적어주세요." 펜을 든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25년간 써오던 그 단어가 이제 내 것이 아니었다. 빈칸을 응시했다. 작게 썼다. '무직.' 펜 끝에서 쓴 그 두 글자가 하얀 종이 위에서 번져 나가는 것 같았다. 직원이 서류를 받아들고 잠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텅 빈 외투의 깃을 여몄다.
대기 소파에 앉아 손바닥을 펼쳐보았다. 빳빳한 사각형의 종이를 건네던 손가락 끝에 미세한 각질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에게 내밀 수 있는 건 이제 땀 밴 빈 손뿐이었다. 은행 로비의 시계가 째깍거렸다. 옆 창구에서 누군가 예금 만기를 확인하고 있었다. 한 장의 종이에 인쇄된 활자가 곧 나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 얇은 사각형 없이는 누구에게도 말을 걸 수 없었던 25년. 그것을 떼어내자, 나는 속이 텅 빈 외투처럼 펄럭거렸다.
서재를 정리하다가 책장 뒤에서 먼지 쌓인 앨범을 꺼냈다. 파란 천 표지가 색이 바래 회색빛으로 변해 있었다. 첫 장을 넘기자 사진 한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모서리가 누렇게 말린 그 사진을 집어 들었다.
30대의 내가 바닷가 어딘가에서 웃고 있었다. 햇빛에 눈을 찡그린 얼굴, 바람에 날린 머리카락, 반팔 티셔츠의 주름까지 선명한데, 정작 그날이 언제였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옆에 어깨동무한 사람의 얼굴은 핀트가 나가 흐릿했다. 배경의 바다는 묘하게 초록빛이었다. 동해였을까, 남해였을까. 사진 속 30대의 나는 프레임 밖 누군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손짓이 닿으려던 곳은 이미 내 기억의 지도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사진을 뒤집었다. 날짜도, 메모도 없었다. 다시 앞면을 보았다. 사진 속 남자는 나인데, 나는 그를 몰랐다. 그는 왜 저렇게 환하게 웃고 있었을까. 누구와 함께였을까. 그날의 바람 냄새도, 파도 소리도, 모래의 감촉도 모두 지워져 있었다. 사진 속 젊은 남자가 짓는 그 미소는, 지금 내가 짓는 미소와 달랐다. 그 미소 뒤에는 근거 없는 자신감과 미래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 것들은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다.
책상 서랍에서 펜을 꺼냈다. 사진 뒷면 빈 공간에 작게 썼다. '누구인가?'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옆 사람도 모르고, 사진을 찍어준 사람도 모르고, 정작 사진 속 당사자인 나조차 모른다.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앨범에 다시 꽂았다. 그 남자는 이제 내 기억 속이 아니라, 종이 위에만 남아 있었다. 타인의 기억이 아니라 나의 기억 속에서도, 나는 이미 실종되어 있었다. 최근 읽은 프랑스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이 떠올랐다. 기억을 잃은 탐정 기 롤랑. 그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그를 다르게 기억했다. 어떤 이는 그를 "조용한 사람"이라 했고, 어떤 이는 "어딘가 위험한 사람"이라 했다. 우리는 결코 진실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 문장이 가슴에 박혔다.
사진을 앨범에 꽂고 서재 창가에 섰다. 저녁 해가 진양호 위로 지고 있었다. 물 위에 비친 석양이 흔들렸다. 마치 기억처럼. 나는 나 자신에게 묻는다. 기억이 정체성을 구성한다면, 기억 없는 나는 누구인가? 모디아노는 답을 주지 않는다. 기 롤랑도 끝내 자신을 찾지 못한다. 찾을수록 더 멀어질 뿐이다. 마치 안개 속 그림자를 쫓는 것처럼. 하지만 예순을 앞둔 지금, 이 질문이 더 이상 두렵지만은 않다. 오히려 기억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해방처럼 느껴진다.
그날 밤, 나는 오래 잠들지 못했다. 새벽녘에야 겨우 눈을 붙였다가, 여섯 시에 일어났다. 진양호 둘레길로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30년 전 사진 속 바닷가는 어디였는지 모르지만, 이 호수는 확실히 안다. 3년째 거의 매일 이 길을 달린다.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허벅지 근육이 팽팽해지고,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호수 위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 안개 속에서는 호수의 윤곽도, 건너편 산도 희미했다.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의 이름은 여전히 떠오르지 않는다. 사진 속 바닷가도 영영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10년 후엔 이 둘레길조차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확실하다.
차가운 공기가 폐를 채운다. 땀이 등을 타고 흐른다. 페달을 밟는 발바닥의 압력이 느껴진다. 기억은 안개처럼 흐려진다. 하지만 페달을 밀어 올리는 허벅지의 둔탁한 통증은 배반하지 않는다. 사라지는 이름들 사이에서, 나는 이 통증을 이정표 삼아 나아간다.
안개가 천천히 걷혔다. 호수 건너편 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뒤에서 자전거 벨 소리가 들렸다. 딸랑. 누군가 나를 추월해 갔다. 흰 머리의 노인이었다. 그도 나처럼 이름 없는 사람일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모르지만, 같은 길을 달린다.
나는 계속 페달을 밟았다. 희미한 길 위를,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