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고
2020년 5월, 거실 소파에 앉아 저녁 뉴스를 보고 있었다. 이용수 할머니가 기자회견장에서 말하고 계셨다. 위안부 피해자였던 할머니가 30년간 함께 활동해온 단체를 고발하는 자리였다. 모금된 돈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정작 할머니들은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고. TV 화면 속 할머니의 흰 머리카락이 형광등 불빛에 반짝였다. 그 뒤를 이어 윤미향 사건이 터졌다. 언론은 연일 '돈'과 '배신'을 이야기했고, SNS에는 비난이 쏟아졌다. 나는 그제야 할머니들의 존재를 '발견'했다. 30년 가까이 매주 수요일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 서 계셨다는 사실을, 나는 2020년이 되어서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
1991년 11월 어느 목요일, 오후 3시 수업을 마친 나는 학생회관 1층 게시판 앞을 지나쳤다. 복도는 을씨년스럽게 차가웠다. 형광등 불빛이 하얗게 쏟아지는 아래,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 최초 증언" 신문 스크랩이 누렇게 바랜 테이프로 비스듬히 붙어 있었다. 여학생 세 명이 플라스틱 서명판을 들고 서 있었고, 그중 한 명이 내게 검은 볼펜을 내밀었다. "일본 정부는 사죄하라. 배상하라."
볼펜을 쥐었다. 차가웠다. 손끝이 시렸다. 나는 이름을 썼다. 볼펜 끝에서 잉크가 번지면서 손가락 둘째마디에 파란 얼룩이 묻었다. 끈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미끄러웠다. 나는 손등으로 그 자국을 문질렀다. 지워지지 않았다. 여학생이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올라갔다. 2층 계단에서 다시 손을 내려다보았다. 파란 자국이 손금 사이에 번져 있었다.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지방대 캠퍼스의 분위기는 뜨겁지 않았고, 나 역시 뜨겁지 않았다. 서명을 하고 계단을 오르는 순간, 나는 이미 그 문제를 잊기 시작했다. 1992년 봄, 서울에서 수요시위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학생회 게시판에 작은 공지가 붙었지만, 연대 집회는 없었다. 동기 한 명이 "우리도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라고 말했다. 나는 "글쎄"라고 얼버무렸다. 사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졸업을 1년 앞둔 스물여섯 살, 취업 준비가 더 급했고, 할머니들의 고통은 멀고 무거웠다. 그날 오후 나는 도서관 3층 열람실에 앉아 영어 문제집을 펼쳤다. 창밖으로 겨울 해가 기울고 있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문제를 풀었다. 할머니들은 내 기억에서 지워졌다.
1993년 졸업. 1995년 입사. 할머니들은 매주 서울에 계셨다. 나는 의식하지 않았다. 아니,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회사 생활은 바빴다. 승진이 중요했다. 할머니들은 멀었다.
2005년 겨울 어느 수요일 정오, 회사 구내식당 천장의 TV에서 수요시위 700회 특집이 흘러나왔다. 김치찌개 냄새가 자욱한 식탁에서, 후배가 "벌써 700회래요"라고 말했다. 나는 배가 고팠다. 뜨거운 국물을 한 숟가락 뜬 채로 무심코 대답했다. "아직도 하고 있어? 끝이 없네."
그 순간, 식탁이 조용해졌다. 맞은편 동료의 시선이 내 뺨을 태웠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니, 귀가 뜨거웠다. 손에 든 숟가락이 무거워졌다.
국물이 갑자기 비렸다.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숟가락 위의 국물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이 내 얼굴을 지우고 있었다. 동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더 무거웠다. "아직도"라는 두 음절 속에 얼마나 폭력적인 망각이 숨어 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1992년부터 2005년까지 13년. 그 13년 동안 할머니들은 매주 그곳에 계셨는데, 나는 단 한 번도 그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화장실에 갔다. 거울 앞에 섰다. 형광등 불빛 아래 내 얼굴이 하얗게 보였다. 1991년 게시판 앞에서 손가락에 파란 잉크를 묻히며 서명했던 그 스물다섯 살 청년은, 2005년 "아직도?"라고 말하는 서른아홉 살 회사원이 되어 있었다. 나는 손을 씻었다. 비누 거품이 하얗게 일었다. 그러나 14년 전 손가락에 묻었던 파란 자국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사무실로 돌아왔다. 창밖으로 겨울 해가 기울고 있었다. 모니터를 켰다. 업무 메일이 쌓여 있었다. 나는 마우스를 쥐었다. 손가락 둘째마디를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식탁의 침묵은 손등에 새겨진 것처럼 남았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가 발표되었다. 뉴스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제 끝나는 건가.'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 할머니들은 합의를 거부했고, 수요시위는 계속되었다. 나는 여전히 가지 않았다.
2020년 5월, 윤미향 사건이 터졌다. 며칠 뒤, 나는 도서관에 갔다. 의무감이었다. '뭐라도 읽어야 한다'는. 역사 코너 서가를 훑다가 프리모 레비의 책이 보였다. 『이것이 인간인가』. 나는 그 책을 뽑아 대출대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 책을 펼쳤다. 첫 문장을 읽었다. "당신들, 안전한 집에서..." 나는 멈췄다. '안전한 집.' 나는 안전한 집에서 29년을 살았다. 1991년부터 2020년까지. 책장을 넘겼다. 레비의 번호가 나왔다. 174517. 유대인 화학자였던 그는 1944년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이 번호로 불렸다. 권력은 사람에게서 이름을 빼앗고 번호를 새겼다. 레비는 해방 후 아무도 듣지 않는 증언을 평생 기록했다. "죽은 자들은 말할 수 없다. 나는 그들을 대신해 말해야 한다." 그에게 글쓰기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였다.
레비의 174517번은 수용소에서 새겨진 번호였고, 나의 29년은 망각 속에서 흘러간 시간이었다. 레비는 번호를 기록했고, 나는 시간을 망각했다. 그 대조가 가슴을 찔렀다. 나는 수용소에 간 적도, 번호를 새긴 적도 없다. 그러나 나는 망각의 공범이었다.
29년이 흘렀다. 그분들은 매주 수요일 정오, 그 자리를 지켰는데, 나는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아니,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몰랐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알고 있었지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서명은 했지만 기억하지 않았고, 알고 있었지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무관심함으로써 할머니들을 두 번 죽였다. 레비는 묻는다. "이것이 인간인가?" 나는 묻는다. "나는 기억하고 있었는가?"
2024년 11월, 생존 할머니는 9명이 남았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이 문장을 쓴다. 1991년 게시판 앞에서 서명만 하고 계단을 올랐던 비겁함을, 2005년 "아직도?"라고 말했던 폭력을, 2020년이 되어서야 할머니들을 '발견'한 부끄러움을. 레비는 174517번을 기록함으로써 지워진 이름들을 되살렸다. 나는 이 기록으로 무엇을 되살릴 수 있을까. 아무것도 되살릴 수 없을지 모른다. 이미 너무 늦었고, 할머니들은 하나둘 떠나가고 있으며, 나의 서명 하나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쓴다. 이 기록이 면죄부는 아니다. 다만 망각의 공범이었던 나를 망각하지 않기 위한, 가장 작고 늦은 저항이다. 키보드를 두드린다. 손가락 둘째마디를 내려다본다. 33년이 지났지만, 1991년 게시판 앞에서 묻었던 파란 잉크 자국이 손끝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레비가 평생을 걸어 174517번을 기록했듯, 나는 이제 33년의 침묵을 기록한다. 할머니들이 매주 서 계셨던 그 자리에, 나는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 빈자리를 기록하기 위해, 나는 이 문장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