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500일의 뒷바라지

남편의 DC Bar 도전과 도시락 700끼

by 유지니안

7월 28일, 새벽 1시 17분.

현관 계단이 삐걱대는 소리가 벽을 타고 거실로 들려왔다. 벌떡 일어나 대문을 열어보니 검은 백팩을 멘 남편이 서 있었다. 너덜거리며 DC에서 일주일 만에 돌아온 남편의 얼굴은 수척했지만, 어딘가 홀가분해 보였다.

"배고프지? 김치찌개 끓여놨어."

"고마워. 일주일 동안 미국 음식만 먹었더니 한국 음식이 너무 반갑네."

남편이 식탁에 앉자 냄비 뚜껑을 열었다. 모락모락 김치찌개의 김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짝꿍인 계란말이.

그 어떠한 말보다 위로가 되는 한밤 중의 한끼였다.




737일의 미국 생활 중 590일째 되는 날이었고, 그중 약 500일은 내가 남편의 점심 도시락을 쌌던 날들이었다. 내가 왜 남편의 점심 도시락을 싸주기 시작했던 걸까.

처음에는 점심시간이 촉박한 수업 스케쥴 때문이었다. King Hall (UCD 로스쿨 건물)에서 식당까지 가려면 최소 15분을 걸어야 했고, 왕복으로 30분을 소비하고나면 오후 수업에 늦을 수 밖에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많은 로스쿨 학생들이 점심은 집에서 싸온 걸로 간단히 먹었다. 심지어 한국인 학생들조차 코스트코나 Trader Joe's에서 미리 사온 샌드위치로 점심을 해결했다. 혹은 전자렌지에 라면을 끓여서 먹거나.


하지만 계속 점심 도시락을 챙겨주는게 힘에 부쳤다.

"여보.. 그냥 학교 식당에서 사 먹으면 안 될까?"

"여기 학식 최소 10달러야. 햄버거를 먹으려고 해도 14달러... 환율 생각하면 거의 2만원."

달러당 1,400원을 넘어선 환율 앞에서 우리는 늘 계산기를 두드렸다. 한국 집이 팔리지 않아 관리비와 대출이자를 이중으로 내고 있던 터라, 10달러짜리 점심도 사치였다.

게다가 방학 때는 학교 식당이 문을 닫았다. 그나마 여는 기숙사 식당들은 King Hall에서 멀어도 너무 멀었다.


그렇게 자진해서 시작된 도시락은 봄이 되고, 여름이 되어도 계속됐다. 김밥, 볶음밥, 샌드위치... 일주일에 5개, 한 달이면 20개. 어느새 500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도저히 챙길 여력이 없을 때면 학교 캐비넷에 쌓아둔 라면으로 떼우라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겨울, 남편이 Bar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챙겨야 할 도시락이 추가됐다. 하루 12시간씩 도서관에 박혀 공부하는 남편을 위해 저녁 도시락까지 싸기 시작한 것이다.

"미안... 7월까지만. 4개월만 참아줘."라는 남편의 말에 웃음이 났다. 그래 한번 해보자. 기왕 이렇게 하기로 한거 내가 할 일은 바로 이거다! 그리고 어쩌면 이 끝없어 보이는 미국 생활에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지도.

나중에는 유튜브를 찾아보며 예쁘게 데코하는 법을 보면서 어느새 즐기는(?) 경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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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2일, 남편이 DC로 떠났다. 총 5박 6일 일정. 시차 적응도 할 겸, 시험 장소도 익힐 겸 3일 전에 미리 DC로 가게 되었다. 시험일은 25일과 26일. 이틀에 걸쳐 오전, 오후로 나눠서 시험을 본다고 했다.

공항에 Lyft로 이동하는 남편을 집 앞에서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졌다. 집에 돌아와 소파에 누웠다. 엘리가 "엄마, 놀자!"고 매달렸지만 일어날 힘이 없었다.

"엘리야, 엄마 좀만 쉴게. 아빠 시험 끝나고 오면 같이 놀자."

그날 밤, 열이 38도까지 올랐다. 500여 일간의 긴장이 한순간에 풀어진 것 같았다. 몸살이었다.

남편한테는 연락하지 않았다. 시험에 집중해야 할 시간에 괜히 걱정이 되게 하기 싫었다. 하지만 엘리까지 챙길 여력은 없어서 DPNS Summer Camp에도 양해를 구했다.

"제가 몸이 아파서 도저히 못갈 것 같아요. 엘리도 결석해야 할 듯 합니다. 누가 제 대신 일해 주실 분?"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남편의 시험날이 다가왔다. 몸살 기운도 슬슬 약해져서 엘리가 먹을 음식도 차려줄 힘이 생겼다. 슬슬 시험을 보고 있을 남편을 위해 기도를 했다. 원래 종교가 있였지만, 그때만큼 종교의 위대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부디 남편이 긴장하지 않게 해주시고, 그가 준비한 만큼 다 보여주고 홀가분하게 그리고 무사하게 돌아 올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7월 26일. 점심을 먹고 엘리와 함께 책을 읽고 있는데,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험 끝!"

남편의 목소리가 밝아보였다. 긴장해서 실수하거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진 않은 것 같아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 수고했어. 시험은 잘 본 것 같아?"

"아직 잘 모르겠어... 그냥 다 쏟아내고 왔어. 후련하기도 하고, 뭔가 다리가 풀리는 느낌이야."

"그래 잘 했어. 이제 무사히 돌아오기만 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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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잘 통화하고 몇 시간 후. 갑자기 남편에게서 재차 전화가 오는 것이 아닌가.

"허리케인 때문에 비행기가 안 뜰 수도 있대."

뭐? 허리케인? 7월에?

"공항에서 1박 해야 하나... 일단 boarding은 했는데 1시간째 대기 중. 비바람이 장난 아니야."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 정말 끝이라고, 내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끝이 아니라니.


오후 7시, 남편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태풍 지나갔어! 지금 출발한다. 새크라멘토에 자정 조금 넘어서 도착할 것 같아."

새크라멘토 공항에서 데이비스까지는 차로 30분. Uber는 비싸다면서 한사코 Lyft로 온다고 했다. 자정이 넘어서 도착하는 상황인지라, 아무래도 미국의 밤거리 치안이 걱정되어 잠이 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지?'

고된 여정으로 헛헛했을 남편을 위해 김치찌개를 끓였다. 잘 익은 김치를 참기름에 볶다가 물과 함께 다시마를 넣고... 500일간 매일 했던 일상적인 요리가 오늘따라 특별하게 느껴졌다. 언제돌아오는지 걱정하면서 기다리며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따뜻한 밥 한끼였다.




"다녀왔어!"

태풍을 뚫고 2,800마일을 넘어 겨우겨우 돌아온 남편의 얼굴을 보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서 와."

그렇게 기다리던 남편이 김치찌개를 한 숟가락 떠먹었다. 그리고 계란말이를 우물우물 베어 물었다.

"아... 이 맛이야. DC에서 매끼를 가져간 컵밥이랑 컵라면으로 떼우다보니 진짜 인스턴트 음식은 물릴 지경이었는데."

큰 시험을 치르러 갔는데 자금 사정 때문에 인스턴트 음식으로 배를 채워야 했던 남편이었다.


500일간 싼 도시락.

숫자로 치면 적지 않은 시간이였고 힘들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모든 게 가치 있게 느껴졌다.

너무 지쳐보이는 남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계란말이를 숟가락 위에 올려주며 그동안 엘리와 있었던 일을 쫑알 쫑알 떠드는 것이였다.


새벽 2시, 남편은 그렇게 김치찌개 냄비를 비웠다. 창밖으론 데이비스의 별이 빛나고 있었다.

737일의 여정 중 590일째. 드디어 남편을 위한 뒷바라지의 한 막이 내렸다. 한 달 뒤에 발표될 결과가 어떻든, 우리는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이겨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겨낼 것이다. 그 시련이 무엇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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