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4살 엘리의 go-to-spot, 잭 슬레이븐
미국 첫 해에는 몰라서 못 갔던 놀이터가 있다. 그곳은 바로....
Jack Slaven Park
엘리의 동네친구 루시아의 엄마, 엘리슨과 대화할 때였다.
"엘리슨, 우리 이번 여름은 어디 못 갈 것 같아... 혹시 여름에 엘리가 놀만한 곳이 있을까?"
"혹시 잭 슬레이븐 파크 가봤어? 물놀이도 할 수 있어서 여름에 딱 좋아!"
처음 듣는 놀이터였다. 데이비스에 있는 놀이터란 놀이터는 다 돌아다녀본 나인데. Slide Hill Park, Arroyo Park, Community Park... 심지어 UC Davis 캠퍼스 안 놀이터까지 섭렵했건만.
"아, 데이비스 내에는 없고, Woodland 가는 길에 새로 만들어진 타운이 있거든. 그 안에 있는 놀이터야."
우드랜드. 코스트코 갈 때마다 지나가는 그 길. 15분 거리의 그곳에 내가 모르는 놀이터가 있다니.
DPNS 여름방학은 6월 초부터 8월 중순까지. 무려 11주다. 특히 썸머캠프도 없는 6월은 그야말로 엘리와 24시간 밀착 육아 시간이었다.
'대체 작년 봄에 DPNS 안 보냈을 때는 어떻게 지냈지?'
돌이켜보니 그땐 West Manor 놀이터에서 그리고 세살짜리를 이끌고 여기저기 마트와 다른 동네를 다니며 탐험하던 우리였다. 내성적인 내가 나 자신이 먼저 움츠러들면 아이도 그렇게 될까봐. 더 당당하고 밝게 Hello! 라고 인사했다. 덕분에 나도 엘리도 성장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엘리와 함께하는 장보기였다. 코스트코라도 가면 엘리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1시간이면 끝날 장보기가 3시간은 기본이었다.
"엄마 이거 사줘!"
"엄마 나 초코!"
"엄마 나 쉬마려!"
"엄마 나 핫도그!"
"콜라 말고 레모네이드로 해야지!"
나중에는 장보기가 마치 둘만의 놀이가 되어서 노래를 부르고, 엘리에게 직접 무엇을 장봐야 할지 써보라고 한뒤 코너 구석 구석을 찾아나섰다. 그후로는 너무나도 힘들었던 육아가 이런 생각까지 들게 했다.
'내성적인 내가 혼자서 집에만 있으면 우울증에 걸릴까봐. 이런 아이를 나에게 주신 것이 아닐까?'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코스트코에서 진을 빼고 돌아오는 길, 갑자기 엘리슨이 말한 놀이터가 떠올랐다.
'우드랜드에서 돌아오는 길목에 있다고 했지.'
내비게이션에 'Jack Slaven Park' 검색. 정말 코스트코에서 10분 거리, Miekle Drive에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데 왜 몰랐을까. 2010년에 만들어진 비교적 새 공원이라고 했는데, 데이비스에 온 지 1년이 넘도록 몰랐다.
도착하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바닥이었다. 우드칩이 아니라 푹신푹신한 고무 우레탄으로 깔려있었다!
'오마이갓, 우드칩 없는 놀이터가 존재하다니!'
데이비스의 놀이터는 대부분 우드칩이었다. 친환경이라고는 하지만, 엘리 손에 가시가 박히기 일쑤였고, 놀다 보면 온몸이 우드칩 가루투성이가 되었다. 한국에선 당연한 우레탄 바닥이 이렇게 고마울 줄이야.
더 놀라운 건 그다음이었다. 놀이터 한쪽에 거대한 물놀이 시설이 있었다. Water-play feature라고 불리는, 바닥에서 물이 솟구치는 놀이터였다. 거대한 구조물에서 물이 쏟아지고, 바닥 곳곳에서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아이들이 뛰어다니면 센서가 감지해서 물이 나오는 인터랙티브 시설도 있었고, 무엇보다 수심이 전혀 없어서 물에 빠질 걱정이 없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이게 공짜라고?'
미국의 공공 놀이터는 정말 대단했다. 한국이었다면 입장료 2만 원은 받았을 시설이 완전 무료였다. 그 옆에는 일반 놀이터도 있었는데, 거대한 복합 놀이기구부터 그네, 농구장, 심지어 개 운동장까지 갖춰져 있었다. 모든 게 새것처럼 깨끗했고, 무엇보다 우레탄 바닥이라 엘리가 넘어져도 크게 다칠 걱정이 없어 보였다.
"엄마, 나 물놀이 하고 싶어!"
수영복을 안 가져온 게 이렇게 한스러울 줄이야.
"엘리야, 오늘은 수영복이 없어서... 다음에 수영복 입고 와서 놀자."
"싫어! 지금 할래!"
그러고는 엄마의 양산을 가지고 물놀이터로 돌진하는 엘리. 온 몸이 물에 젖는지도 모르고 신나게 노는 엘리를 보니 맥이 탁 풀렸다.
'저러다 감기 걸리면 어떡하지.'
다행히 엘리는 옷이 젖어 불편했는지 금방 나왔다. 그러고는 성 모양 놀이기구에 홀려서 그쪽으로 달려갔다. 한 시간 내내 미끄럼틀을 타고 또 타고, 다른 아이들과 숨바꼭질도 하고, 심지어 처음 본 아이한테 "What's your name?"이라고 묻기까지 했다. 그 사이 엘리의 옷은 바짝 말라버렸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벤치에 앉아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엘리를 쫓아다니지 않아도, 계속 "조심해!" "거기 위험해!" 외치지 않아도 되는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게 육아 천국이구나.'
그날 이후, 엘리는 "물놀이터 가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결국 다음 날, 완벽히 준비해서 다시 찾았다. 수건, 갈아입을 옷, 물총, 간식, 물... 수영복은 미리 집에서 입고 가고, 선크림도 사전에 꼼꼼히 발라두었다.
그렇게 다시 도착한 잭 슬레이븐 파크.
처음엔 조심스럽게 발가락만 담그던 엘리. 물이 생각보다 차가웠는지 "으~ 차가워!"라며 금세 발을 뺐다. 하지만 금새 적응했는지 물에 발을 담근 채 첨벙첨벙 물장구를 쳤다.
그때였다.
퍼---억-----!
갑자기 구조물에서 거대한 물줄기가 쏟아졌다. 타이밍도 참 절묘하게, 엘리가 바로 그 아래를 지나가던 순간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젖은 엘리가 비명을 지르며 내게로 도망쳤다.
"으아앙! 무서워!"
"괜찮아, 엘리야. 엄마가 먼저 가볼게. 봐, 재미있잖아?"
내가 먼저 물 아래 서서 "와~ 시원하다!"라고 외치니 엘리도 용기를 냈다. 처음엔 내 손을 꼭 잡고 조금씩, 조금씩 가까이 와서는 결국 물 아래서 깔깔거리며 웃었다. 적응력 하나는 정말 빠른 아이였다.
"엄마! 나 봐! 나 용감하지?"
"그럼! 우리 엘리 완전 용감해!"
30분쯤 지나니 엘리 입술이 새파래졌다. 6월이라도 물은 생각보다 차가웠고, 계속 물놀이만 하기엔 체온이 너무 떨어질 것 같았다.
"엘리야, 잠깐 나와서 쉬자."
"싫어! 더 놀래!"
"저기 봐, 미끄럼틀도 있네? 저기 가서 좀 놀다가 다시 물놀이하자. 미끄럼틀 타고 몸 좀 따뜻하게 하고 다시 물놀이하면 더 재미있을 거야."
미끄럼틀은 햇볕에 따끈따끈하게 데워져 있었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듯, 물놀이터와 일반 놀이터를 왔다갔다 하는 엘리를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게 바로 '자연 찜질방'이 아닌가. 그 덕분에 감기 걱정 없이 2시간을 놀 수 있었고,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엘리는 곯아떨어졌다.
엘리의 잭 슬레이븐 파크 사랑은 남편이 Bar 시험을 보고온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데이비스의 8월은 정말 미친 듯이 더웠는데, 매일 40도를 넘나들었고, 에어컨 없는 차를 타는 건 고문에 가까웠다.
"오늘도 잭 슬레이븐?"
"응. 엘리야, 수영복 입자!"
"엄마도 같이 가?"
"엄마는... 집에서 쉴게."
그 동안 육아에 남편 뒷바라지에 너무 힘들고 지쳐버렸다. 무엇보다 나도 이제는 진짜 엘리 없는, 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놀이터 갔다가 코스트코 들러서 장 좀 봐와."
"그래, 알았어. 엘리야, 가자!"
남편과 엘리가 나간 사이, 나는 오랜만에 혼자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넷플릭스로 '슈츠(Suits)' 정주행을 시작했는데, 법조계 드라마를 보며 남편의 Bar 시험 합격을 기원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솔직히 그냥 혼자 TV 볼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3편 연속으로 봤는데도 아무도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 이 고요함이란.
8월 말,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마지막으로 잭 슬레이븐 파크를 찾았다. 이제는 엘리도 물놀이터 전문가가 되어서 처음 본 아이들과도 물총 싸움을 하고, "Watch this!"라며 자신만의 묘기를 선보이기까지 했다.
"엘리야, 이제 곧 학교 가야 해서 자주 못 올 것 같아."
"왜? 나 여기 좋은데."
"대신 주말에 올 수 있어."
엘리가 물놀이터를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미국 생활 중 가장 큰 발견 중 하나는, 돈 없어도 아이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플로리다 여행은 못 갔지만, 잭 슬레이븐 파크가 있었다. 디즈니랜드 연간 패스는 없었지만, 무료 Water feature가 있었다. 한국에선 키즈카페 한 번 가려면 3만 원인데, 여기선 공짜로 2시간을 놀 수 있었다.
지금 한국에서 엘리는 어린이집은 기본이고 영어 학원에, 수영에, 미술에 태권도까지, 하루 스케줄이 빡빡하다. 가끔 엘리가 묻는다.
"엄마, 미국 물놀이터 기억나?"
"응, 잭 슬레이븐?"
"거기 또 가고 싶어."
나도 그립다. 그 뜨거운 햇살 아래, 차가운 물줄기. 아무 걱정 없이 뛰어놀던 그 시절이.
잭 슬레이븐 파크는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우리 가족에게 주어진 작은 오아시스였고, 미국 생활 중 가장 덥고 힘들었지만 가장 시원하고 행복했던 추억이었다.
그래, 우리에겐 잭 슬레이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