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명 - 썸머캠프를 등록하라!
"엄마, 점심 먹고 나가까?"
5월 중순의 어느 아침, 엘리가 DPNS에서 돌아오자마자 물었다. 아직 오후 1시. 하루가 너무 길다. 그나마 오전은 DPNS에서 책임진다고 하지만, 3개월짜리 여름방학은 어떻게 버틸 것인가. 40도를 오르내리는 살인적인 더위 속에서 데이비스라는 작은 소도시에 갇혀 있어야 하는 현실이 참으로 암담했다.
남편은 기말고사가 끝나는 동시에 버닝 모드에 들어갔다. 매일 아침 일찍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서 해떨어지기 전까지 공부하고 돌아왔는데, 항상 집에 오면 온 힘을 다해 공부한 듯 지쳐보였다. 30 중반에 다시 시험공부라니, 나라면 스트레스 때문에 미쳤을 것 같은데 본인은 의외로 괜찮아 보였다.
오히려 문제가 된 건 멘탈이 아니라 몸. 작년 말부터 삐끄덕대던 남편의 목 디스크가 계속 말썽을 부렸다. 최대한 목보호대를 착용하고, 책을 쌓아 노트북을 눈높이까지 올리고, 따로 키보드를 장만해서 사용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나마 지인을 통해 알아둔 침술원이 있어 다행이었다. 남편은 거의 매주 침맞고 부항을 뜨러 다녔다. 그나마 보험 처리가 되서 천만 다행인 셈(57화 참고).
나에게 있어, 남편의 Bar 공부 상황이나 몸 상태도 중요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 '공부'가 7월 말까지 계속된다는 것. 그리고 그 동안 엘리와 나는 데이비스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
"여보, 나 이번 여름에 정말 어디도 못 갈 것 같아. 미안."
나도 남편이 Bar 합격에 열중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작년에 남편의 Bar 시험을 독려하면서 '이번 여름, 여행 한번 제대로 못 가겠구나'하고 미리 단념했지만, 막상 여름이 되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작년에는 그대로 제법 놀러다녔던 것 같았다. 봄에는 타호 호수로 1박 2일 여행, 여름에는 캘리포니아 1번 국도 여행, 그리고 가을에는 DPNS 친구들과 1박2일 캠핑까지. 그 즐겁고, 행복하고, 가슴 충만한 추억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먹먹하다. 물론 씁쓸쌉쌀한 기억들도 있었지만.
하지만 그 이후로 우리는 여행다운 여행을 다녀오지 못했다. 겨울에는 너무나 비싼 호텔값, 비행기값 때문에 플로리다 여행을 포기. 남편 MPRE 시험 때문에 봄방학도 포기. 그리고 이번 여름도 아무데도 못 갈 것이었다.
상념을 멈추고, 밖으로 나가자는 엘리를 쳐다봤다. 네 살이 되니 체력이 장난이 아니다. 낮잠도 더 이상 안잔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 때까지 쉬지 않고 움직인다. 말도 끊임없이 한다. "엄마 이거 봐", "엄마 저거 뭐야", "엄마 나랑 놀자". 하루 종일 '엄마'를 불러댄다.
맙소사, 11주를 어떻게 버티지?
시간을 조금 거슬러, 3월의 어느 날.
"썸머캠프 등록 시작했대요! 3월 31일까지!"
DPNS 엄마 채팅방에 올라온 메시지를 보자마자 달력을 확인했다. DPNS 썸머캠프는 7월 10일부터 8월 3일까지 4주간 진행되었다. 월-목 오전 9시부터 11시 45분까지. 금요일은 휴무. 일반 데이케어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4주 전체를 다 등록해야 한대. $500!"
4주에 $500. 정규 학기에 비하면 약 2배 정도 더 비싼 금액이었다. 그렇지만 정규 학기처럼 부모가 주 1회 보조교사로 참여해야 하고, 장난감 정리나 청소도 해야 했다. 그 와중에 당연히 Snack도 싸가야 하고 말이다. 게다가 4주의 일부만 등록할 수도 없으니, 여름휴가 계획이 있는 가족들은 고민이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우리는 어차피 못 가니까..."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앱을 열었다. 그나마 엘리가 DPNS 재학생이라 우선등록 자격이 있었다. 늦게 신청하면 대기자 명단에 올라가야 한다니, 서둘러 Application fee $25와 Tuition fee $500을 납부했다.
"등록 완료!"
화면에 뜬 확인 메시지를 보며 한숨 반, 안도 반. 일단 7월 한 달은 썸머캠프가 있으니 다행이었다. 8월부터는 남편의 Bar 시험이 끝나니까 남편에게 엘리를 보라고 하면 될 테니까... 문제는 5월 중순부터 6월까지 약 6주.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데이비스에는 Mary L. Stephens Library라는 훌륭한 도서관이 있다. 아이들과 성인들을 위한 다양한 도서들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여러 인종이 함께 어울려 지내는 만큼 영어 뿐 아니라 스페인어, 중국어, 일본어, 하물며 한국어 책도 마련되어 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독서, 토론 뿐 아니라 컴퓨터 코딩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도서관보다는 행정복지센터 차원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달까.
"엘리야, 우리 도서관 가서 특별한 나무 만들래?"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Growing Tree' 프로젝트가 있었다. 아이들이 여름 시작할 때 자기 손바닥을 색종이에 대고 그려서 이름을 쓴 뒤, 큰 나무 줄기에 붙이는 것이다. 그리고 여름이 끝날 때 다시 한 번 손바닥을 그려서 붙인다.
"엘리, 손 여기 올려봐."
녹색 종이 위에 엘리의 작은 손을 올리고 연필로 따라 그렸다. 'Ellie'라고 삐뚤빼뚤 쓴 다음, 가위로 오려서 갈색 종이로 만든 커다란 나무 줄기에 붙였다. 벌써 수십 개의 형형색색 손바닥들이 나뭇잎처럼 달려 있었다.
"엄마, 내 손 어디 있어?" "저기, 파란색 손 옆에 있네!"
8월 말, 다시 도서관에 갔을 때 엘리는 자기 손바닥을 찾아 그 옆에 새 손바닥을 붙였다.
"엄마 봐! 내 손이 커졌어!"
정말이었다. 6월의 손바닥보다 8월의 손바닥이 눈에 띄게 커져 있었다. 단순한 미술 활동이 아니라 아이의 성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리고 여름의 추억이 담긴 예술 작품이 되었다.
놀라운 건 도서관이 단순히 책만 빌려주는 곳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이들 섹션에는 각종 보드게임과 두뇌발달용 장난감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퍼즐, 블록, 간단한 보드게임부터 청소년과 성인을 위한 체스, 체커스, 그리고 노인들도 즐길 수 있는 대형 글씨 카드게임까지.
"Can we play with this?"
엘리가 보드게임 모노폴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사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빌려가서 놀 수도 있단다. 에어컨이 빵빵한 도서관에서 책도 읽고, 게임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이보다 완벽한 여름 피난처가 있을까?
레고놀이를 하고 집에 가려는데, 사서가 말을 걸었다.
"Summer Reading Program에 참여하시겠어요? 아이가 책을 빌려 읽으면 찍어주는 도장을 모으면, 배지와 보상을 드려요. 이번 보상은 무려 Raising Cane's Chicken Fingers라구요!"
이런 프로그램이 있다니. 엘리가 영어책을 가까이 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엘리는 아직 혼자 읽기는 어렵지만, 내가 읽어주는 것도 카운트된단다.
"엘리! 우리 배지 받고 치킨도 먹어볼까?"
"움... 배지가 뭔데?"
"엘리가 잘했다고 주는 상이야."
"상? 그러면 할래!"
그렇게 엘리의 영어책 읽기가 여름나기 일정에 추가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7월 말까지 도장을 반도 채우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히, Bar 시험이 끝난 남편이 적극적으로 책을 읽혀서 8월에 급하게 도장을 모았다. 엘리는 배지를 받았고, 남편은 그 보상으로 치킨을 먹을 수 있었고 말이다.
"SwimAmerica 들어보셨어요?"
데이비스에서 만난 일본인 친구, 미요가 말했다. 공공 수영장인 Dart에 등록하려다 실패한 이야기를 하자, 그녀가 추천해준 곳이었다.
"Dart는 싸긴 한데, 등록하는게 진짜 어려워요. SwimAmerica는 좀 비싸긴 해도 확실하게 수영을 가르쳐요."
검색해보니 South Davis 쪽에 실내 수영장이 있었다. 한 세션(8회)에 $160. Dart의 두세 배 가격이지만, 실내라서 날씨 걱정이 없고, 소규모 그룹레슨이라 제대로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등록을 마치고 첫 수업에 갔다. 깨끗한 실내 수영장, 체계적인 커리큘럼, 그리고 무엇보다 실내에서 에어컨 바람 쐬면서 기다릴 수 있다는 것!
"Today we're learning how to blow bubbles!"
강사가 아이들을 풀장으로 이끌었다. 한 그룹에 3명. 엘리 또래의 백인 그리고 멕시칸 여자아이들이 함께였다. Dart에서는 10명이 넘는 아이들과 그저 물놀이만 했다면, 여기서는 진짜 '수영 수업'이 진행됐다.
"Ellie, great job!"
강사의 칭찬에 엘리가 활짝 웃었다. 30분 수업이 끝나고 나오는 엘리의 표정이 밝았다.
"엄마, 나 물속에서 눈 뜰 수 있어!"
자랑스럽게 말하는 엘리를 보며, 비싼 수업료가 아깝지 않았다.
한편, 엘리와 함께 집 근처 Village Homes를 산책하다 보면 자주 지나치게 되는 건물이 있었다. 그 곳이 바로 Applegate Dance Studio. 엘리 또래의 아이들이 발레를 배우는 교습소였다.
'우리 엘리, 엄청 활기차고 춤추는거 좋아하는데 발레 한 번 시켜볼까?'
방문해서 상담해보니 마침 Summer Camp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주 2회, 오후 2시부터 45분간 진행되는 수업이었다. 한달에 $100.
'한국에서보다 더 싼거 같은데? 거기다 물가 차이까지 생각하면...'
이건 하는게 이득이었다. 엘리도 '공주님'처럼 춤 추는 언니들을 보고, 자기도 꼭 하고 싶다고 성화였다.
그렇게 그날 바로 Summer Camp를 등록했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했던가. 기왕 시간이 많이 남는 김에, 엘리가 한국에 돌아가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이번 여름에 한글과 수학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다짐했다.
"엄마, 루시는 영어 잘하고, 한국말 못 해. 근데 나는 왜 한국말 해야 돼?"
DPNS 친구들은 모두 영어만 쓰는데, 왜 자기만 한글을 배워야 하는지 의문인 모양이다.
"한국말도 할 수 있으면 더 똑똑한 거야. 비밀 언어가 있는 거지!"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쉽게 납득할 만한 대답을 했다. 효과가 있었는지 엘리는 "비밀 언어!"를 외치며 좋아했다.
한글 교육을 위해 선택한 방법은 '한글용사 아이야'. 유튜브를 틀면 나오는 EBS 영상이었다. 사실 한국에서 가져온 한글공부 책들이 많았다. 따라쓰기 교재부터 자음모음 자석까지 없는게 없었지만, 다 소용없었다.
"아이야! 도와줘!"
TV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엘리가 반응한다. 다른 건 몰라도 EBS는 정말 수신료가 아깝지 않은 것 같다. 이런 좋은 컨텐츠를 만들어준 EBS에 감사하며, 엘리와 함께 아이야를 시청했다.
"ㄱ이 ㅏ를 만나 가!"
엘리와 함께 상호작용을 하면서 TV를 보니, 엘리의 한글 실력이 빠르게 느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한글을 배우면서, 프뢰벨, 놀라운 자연, 도레미곰, STEPS 등 한국에서 가져온 책들을 함께 읽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워크북으로 같이 하나하나 쓰고 읽었다.
수학은 'Numberblocks'라는 영국 애니메이션을 활용했다. 숫자들이 캐릭터로 나와서 더하기, 빼기를 가르쳐준다. 노래가 중독성 있어서 엘리가 하루 종일 "One Two Three Four Five, Numberblocks! One, and another one is two And another one is Three!"를 흥얼거린다.
"엘리야, 엘리가 블루베리 4개가 있는데, 아빠가 1개를 더 주면 몇 개?"
"음...5개!"
저녁 식사 시간,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며 엘리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Numberblocks 덕분에 산수에 대한 흥미를 가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물론 한국 또래들은 선행 학습을 많이 하는 것처럼 보였다. '7세 고시'니 '황소 수학'이니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아이에게는 아이에게 맞는 학습 속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1학년 때 구구단을 아무리해도 외워지지가 않았는데, 2학년이 되니까 구구단이 저절로 이해가 되었던 경험이 있어서일까.
소수의 천재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나이대에 걸맞는 학습능력을 가질 수 밖에 없고, 그걸 벗어난 공부는 아무리 시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공부는 누군가 강요해서 되는게 아니라, 스스로가 흥미를 느끼게 만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아이에게 학습에 대한 두려움을 야기한다면 본말전도가 아닐까.
물론 각자에게는 각자의 교육관이 있지만 말이다.
드디어 여름 계획표가 완성됐다.
월요일부터 목요일 오전: DPNS 썸머캠프
화·목 오후: 발레
월·수 오후: 수영
금 오전·오후: 도서관 프로그램
주말: ... 주말은 남편이 알아서 하겠지.
빼곡하게 채워진 일정표를 보며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 정도면 여름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여행은 못 가지만, 데이비스에서 보내는 첫 여름. 엘리에게는 새로운 경험이 가득한 여름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엄마, 내일 뭐해?"
또 시작이다. 하지만 이제는 대답할 거리가 있다.
"내일은 발레학원 가는 날이야. Frozen에 나오는 엘사처럼 춤 춰보자!"
엘리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그래, 이 여름도 어떻게든 지나가겠지. 남편 Bar 시험이 끝나는 7월 말까지만 버티면 된다. 그때까지 어떻게든 버텨보자..!'
미국에서 섬머캠프를 준비하는 법
- 3월부터 여름 프로그램 정보 수집 시작
- 4월 초 등록 일정 달력에 표시
- 플랜 B, C까지 준비 (인기 프로그램은 경쟁률 높음)
- 무료 프로그램도 많으니 도서관, 커뮤니티센터 뉴스레터 구독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