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 아이가 마주한 ‘다름’과 엄마가 처음 느낀 ‘차이’
Fall Festival이 끝나고 일주일 뒤, 어느새 10월의 마지막 주가 되었다.
엘리와 함께하는 DPNS Duty Day. 수업을 마치고 Trader Joe's에 우유와 빵을 사러 갔다가, 입구에 전시된 거대한 호박 장식들을 보고 문득 깨달았다.
"아, 할로윈이 이번 주구나!"
"엄마, 할로윈이 뭐야?"
너무 움직임이 많아 카트에 가둬 둔 엘리가 물었다.
"음... 귀신처럼 무서운 옷을 입고 돌아다니면서 사탕 받으러 다니는 날이야."
그래, 할로윈이 다가오고 있었다. 미국에 와서 처음 맞는 할로윈. 한국에서도 몇 년 전부터 할로윈 문화가 생겼지만, 여기는 차원이 달랐다. Trader Joe's 안에서도 직원들이 벌써 호박 머리띠나 마녀 모자를 쓰고 일하고 있었고, 계산대 옆에는 할로윈 한정판 과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엄마, 나도 귀신 옷 입어?"
"아니야, 엘리는 예쁜 옷 입을 거야. 아기상어 옷 있잖아."
이럴 때를 대비해서 노란 아기상어 코스튬을 아마존에서 구매해두었다. 아기상어 코스튬을 뒤집어 쓴 엘리 모습을 상상하니 할로윈이 기대되었다.
10월 31일, 드디어 그날이 왔다. 할로윈을 맞아 아침부터 DPNS에서 Parade가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치원에 도착하자마자 표정이 확 굳어지는 엘리. 남자아이들은 마법사, 기린, 기사, 스파이더맨, 배트맨, 아이언맨 복장을 하고 있었고, 여자아이들은 하나같이 반짝이는 디즈니 공주와 마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Mommy, I want princess..."
엘리가 내 손을 꼭 잡으며 속삭였다. 순간 미안하면서도 섭섭하기도 한 마음이 들었다. 엘리는 이미 공주를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되어 있었는데, 나만 아직도 '아기'로 보고 있었구나 싶었다. 언제 이렇게 커버린 걸까.
선생님이 음악을 틀자 아이들이 일렬로 서서 DPNS yard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아, 그래서 parade구나. 노란 아기상어 한 마리가 분홍 드레스들 사이에서 튀어 보였지만, 그래도 엘리는 열심히 행진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 엘리가 말했다.
"엄마, 나도 엘사처럼 예쁜 공주 되고 싶어."
"그래, 오늘 오후에는 공주 드레스 입자. 엄마가 미안해."
점심을 먹은 후, 약속대로 엘리에게 신데렐라 드레스를 입혔다. 부모님이 오셨을 때, 디즈니 샵에서 사주신 드레스였다. 당시엔 엘리가 공주 옷을 받고도 시큰둥해서 조금 서운했었다. 그래서 이번 할로윈에도 아기상어 옷을 입혔는데...
"엘리야, 신데렐라 드레스 입어볼래?"
파란색 드레스가 펼쳐지자 엘리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와! 너무 이뻐!"
하지만 거울을 보며 빙글빙글 돌던 엘리가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엄마, 나는 진짜 공주가 아니야."
"왜? 엘리도 예쁜 공주 드레스 입었잖아."
"페이지가 엘사 옷 입으면 진짜 엘사 같은데... 페이지는 노란 머리인데 나는 검은 머리잖아."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영어에 익숙해지길 바라며 디즈니 영화를 수없이 보여줬는데, 오히려 그게 독이 된 건가. 백인 금발의 공주만이 '진짜'라고 느끼게 만든 건 아닐까.
디즈니에도 뮬란이 있고, 최근엔 모아나도 있지만, 전통적인 '공주'의 이미지는 여전히 백설공주, 신데렐라, 엘사였다. 어린아이의 눈에 '공주'란 특정 인종의 전유물처럼 각인된 것일까.
"엘리야, 공주는 마음이 예쁜 사람이 되는 거야. 피부색이나 머리색은 상관없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3살 아이에게 인종과 다양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방인으로 사는 것의 또 다른 무게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할로윈에도 수업이 있어 학교에서 공부하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Downtown에서 할로윈 행사한대. 같이 가자."
"오후에 수업이 있는데..."
"엘리가 공주 드레스 입고 기다리고 있어."
전화 너머로 고민섞인 침묵이 한 3초간 흘렀을까, 곧 알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가족 행사에는 꼭 함께하자던 우리의 약속. 특히 엘리의 첫 미국 할로윈이니 더욱 의미가 있었다. 타지에서 우리 셋이 함께하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나중에야 깨닫게 될 테니까.
"3시에 Central Park에서 만나!"
Downtown에 도착하자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Davis Downtown Business Association이 주최하는 'Treat Trail'이 한창이었다. 2nd Street부터 5th Street까지, 참여하는 모든 상점에 주황색 호박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Delta of Venus 카페 직원들은 모두 마녀 복장을, Avid Reader 서점에서는 해리포터 테마로 꾸며놓고 버터비어(실제로는 크림소다)를 나눠주고 있었다. 심지어 Chase Bank 직원들까지 좀비 분장을 하고 아이들에게 사탕과 함께 저금통을 나눠주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Trick or treat!"
처음엔 작은 목소리로 시작했던 엘리가 점점 자신감을 얻어갔다.
Golden 1 Credit Union 앞에는 마녀 복장을 한 직원 두 명이 커다란 사탕 바구니를 들고 아이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한 직원은 검은 마녀 모자에 빨간 머리 가발을, 다른 직원은 해골 무늬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What a beautiful princess!"
신데렐라 드레스를 입은 엘리에게 풀 사이즈 킷캣을 건네주었다. 엘리의 유니콘 바구니가 점점 무거워졌다.
책방에서는 갑자기 거대한 좀비가 나타나기도 했다. 엘리도 좀비를 보고 놀라서 남편 다리 뒤로 숨었다.
"괜찮아, 엘리야. 저 아저씨도 변장한 거야."
미국 할로윈의 양면성이랄까. 귀엽고 달콤한 면도 있지만, 정말로 무서운 요소들도 곳곳에 있었다.
Downtown을 돌다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Ellie! Ellie!"
DPNS 친구 Lucy였다. 보라색 마법사 망토에 뾰족한 모자까지 쓴 루시가 뛰어왔다.
"Look! I'm a wizard!"
지팡이를 휘두르며 주문을 외우는 시늉을 했다. 루시 엄마가 따라오며 웃었다.
"이 아이가 아침부터 지팡이를 놓질 않네요. Happy Halloween!"
해가 지면서 진짜 할로윈이 시작됐다.
사실 며칠 전부터 이웃집들이 하나둘 장식을 시작하긴 했지만, 밤에 보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낮에는 그저 호박 장식 정도였는데, 어둠 속에서는 LED 조명과 모션 센서가 달린 유령들이 으스스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하필이면 남편이 저녁 늦게까지 수업이 있는 날. 중요한 발표가 있던 남편은 다시 학교로 돌아갔고, 어쩔 수 없이 나 혼자 엘리를 데리고 할로윈의 밤을 보내야 했다.
'아무리 중요한 발표더라도 가족 행사는 함께 참석해야지.'
할로윈에 나 홀로 엘리를 데리고 동냥(?)다녔던 일은 엘리와 나의 평생 기억에 남았다. 극 I인 내가 먼저 사람에게 다가가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내가 다른 사람의 집에 스스럼없이 방문했다는 걸 아마 내 지인들과 가족들은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내 아이를 통해서 나 역시 새롭게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엘리에게 강렬하게 남은 미국의 첫 기억 역시 할로윈이 되었다.
동네를 돌며 초인종을 누르는 일은 정말로 어색했다. 한국에서라면 상상도 못 할 일. 하지만 문을 열고 나온 이웃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Oh, what a beautiful Cinderella!"
한 집에서는 할머니가 풀 사이즈 초콜릿 바를 내밀었다.
"우리 동네에 이렇게 예쁜 공주님이 살았구나!"
또 어떤 집은 아예 현관에 "Please Take One!" 표지판과 함께 사탕 바구니를 내놓았다. 아무도 지키지 않는데도 아이들은 정말로 하나씩만 가져갔다.
밤 10시, 집에 돌아온 엘리는 하루 종일 모은 사탕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초콜릿, 젤리, 막대사탕...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종류들도 많았다.
"Mommy, so many candies!"
피곤함도 잊은 채 반짝이는 엘리의 눈빛. 사탕 하나를 까서 입에 넣어주니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엘리에게 할로윈이 정말 크게 각인되었나보다. 5월에 다녀온 1번국도 여행, 특히 동물원과 씨월드, 레고랜드를 갔던 것들은 모두 잊혀졌지만, 할로윈 때 겪었던 일들은 지금까지도 생각난다고 하니까. 그렇게 엘리의 첫 미국에서의 기억은 할로윈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우리가 거주하고 있던 아파트에서 할로윈 코스튬 콘테스트가 열렸다. 고민 끝에 엘리에게 오징어게임에 나온 핑크색 병정복을 입혀보았다. 역시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Oh my god! Squid Game!"
공주 드레스를 입었을 때보다 훨씬 뜨거운 반응이었다. 심지어 1등은 못했지만 특별상으로 아마존 $25 기프트카드까지 받았다.
한국인이 한국 콘텐츠를 활용했을 때 오히려 더 큰 감동과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굳이 그들처럼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우리만의 것으로도 충분히 특별할 수 있다는 것을.
$25은 작은 금액이었지만, 환율 1,400원을 곱하면 35,000원. 요즘 우리에겐 결코 작지 않은 돈이었다. 무엇보다 '우리도 뭔가 해냈다'는 작은 성취감이 주는 기쁨이 컸다.
작은 성공들이 모여 큰 기적을 이룬다고 믿는다. 적어도 그날 우리는 데이비스의 특별한 가족이었다.
온 마을이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2022년 10월. 그게 우리가 경험한 진짜 할로윈이었다.
데이비스에서 행복한 할로윈을 보내던 바로 그 시각, 우리가 모르는 새 지구 반대편 서울에서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우리는 할로윈이 끝나고 며칠 뒤에야 우연히 SNS를 통해 이태원 참사 소식을 접했다. 손이 떨리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이었다. 우리가 사탕을 나눠받으며 웃고 있을 때, 누군가의 자녀들이 좁은 골목에서 숨을 쉴 수 없었다니.
한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 우리만 안전하고 행복했던 것 같아서. 멀리서나마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3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 할로윈은 예전 같지 않다고 들었다. 그 가슴 아픈 사건 이후로 축제의 의미가 퇴색된 것 같아 안타깝다. 물론 안전이 가장 중요하지만, 온 동네가 아이들을 위해 하나가 되는 그 마법 같은 순간들이 언젠가는 데이비스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재현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