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축제를 만드는 사람들

DPNS Fall Festival, 우리가 만드는 우리의 축제

by 유지니안

10월 22일, 토요일 새벽 6시.

아직 어둑한 DPNS 주차장엔 벌써 여러 대의 차들이 와 있었다. 오늘은 DPNS Fall Festival. DPNS는 부모 협업형 어린이집 답게 행사도 학부모들이 a to z 모두 직접 기획, 준비 및 진행해야 했다. 우리 가족이 담당한 일은 Party Setup Crew. 축제가 잘 시작할 수 있도록 각종 장난감을 창고에서 꺼내 배치하고, 새로 만든 데코레이션을 장식하는 역할을 맡았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호박 나르기. 전날에 DPNS 학부모 중 큰 농장을 운영하는 Sawyer 가족이 Festival에 사용할 호박을 트럭 째로 기부했기 때문이다. DPNS 창고 앞에 산처럼 쌓여있는 주황색 호박들이 제법 압박감있게 다가왔다. 남편이 먼저 나서서 큰 호박을 끙끙대며 들어 올렸다. 그때 학부모 회장인 Ms. Rachel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We have carts over there!"

남편의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 이미 등에선 땀이 송글송글. 카트를 끌고 오니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 엘리와 다른 아이들이 작은 호박들을 카트에 싣는 걸 도와주다가, 어느새 빈 카트에 올라타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들 웃으며 아이들의 장난을 즐기는 듯했다.


3시간의 설치 작업. 호박 나르기, 게임 부스 세우기, 표지판 꽂기, 풍선 불기... 팔이 떨어질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 즐거웠다. 옆에서 함께 땀 흘리는 다른 부모들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한국에선 이런 일은 대부분 선생님들의 몫이었는데.

"엄마, 도와줄까?"

엘리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Ring Toss 게임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도와주겠다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오히려 일을 더 만들었지만, 그 모습이 귀여워서 그냥 놔뒀다.

금세 지루해진 엘리는 다른 아이들과 뛰어놀러 갔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게임 부스 사이를 누비며 까르르 웃는 아이들. 그 모습을 보니 피곤함이 조금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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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드디어 축제가 시작됐다.

평소엔 그저 푸른 잔디밭이었던 yard가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변신해 있었다. 곳곳에 게임 부스가 설치되고, 알록달록한 풍선과 깃발이 가을바람에 펄럭였다. 군데군데 놓여져 있는 주황색 호박이 퍽 정겨운 모양새였다.


엘리가 첫 번째로 달려간 곳은 Pumpkin Bowling. 작은 호박을 굴려 페트병을 쓰러뜨리는 단순한 게임이었지만, 아이들에겐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놀이였다. 통통- 호박이 삐뚤게 굴러가더니 페트병 하나를 간신히 건드렸다. 게임 담당 학부모는 그래도 환하게 웃으며 엘리의 카드에 도장을 찍어줬다.


도장 10개를 모으면 상품으로 바꿀 수 있다는 설명에 엘리의 눈이 반짝였다. 그 뒤로는 미친 듯이 게임을 섭렵했다. Witch Hat Ring Toss, Candy Corn Ring Toss, Bean Bag Toss, Matching Floating Ducks... 게임 이름은 거창했지만 사실 다 단순한 놀이들이었다.

엘리는 누구보다 빠르게 도장 10개를 모아 작은 인형을 받았다. 아마존에서 2달러면 살 수 있을 법한 작은 선물이었지만, 엘리에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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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Petting Zoo였다. 앞서 이야기한 Sawyer 가족이 자기 농장에서 토끼 세 마리와 염소 두 마리를 직접 데려와 있었다. 티켓 한 장으로 3분간 동물들과 교감할 수 있었는데, 다들 작은 동물들이 너무 신기한지 벌써부터 긴 줄이 만들어져 있었다.

드디어 엘리 차례. Petting Zoo 담당 학부모가 조심스럽게 토끼를 엘리 품에 안겨줬다. 하얀 털뭉치가 엘리의 작은 팔 안에서 몸을 웅크렸다. 엘리가 경이로운 표정으로 토끼를 쓰다듬었다. 그 따뜻한 온기, 빠르게 뛰는 심장, 분홍색 코의 씰룩거림. 엘리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토끼를 바라봤다. 3분이 언제 지나갔는지, 시간이 되자 아쉬운 표정으로 토끼를 돌려줬지만 손엔 아직도 그 온기가 남아있는 듯 계속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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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축제 준비하면서 토끼를 미리 만져본 엘리 / 축제 중 petting zoo 체험


점심시간이 되자 음식 부스 쪽이 북적거렸다.

놀랍게도 솜사탕 기계 앞에 선 사람은 UC Davis 헌법 교수인 Tang 씨였다. 하얀 솜사탕 가루를 뒤집어쓴 채 진지한 표정으로 솜사탕을 돌돌 말고 있는 모습이 묘하게 부조화스러우면서도 멋졌다. 교수든, 엔지니어든, 전업주부든, 여기선 모두가 똑같은 DPNS 부모였다. 각자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부러웠다. 한국이었다면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대학 교수가 직접 솜사탕을 만들어 파는 모습을.


Chili Cook-off도 성황리에 펼쳐졌다. 10개 팀의 학부모들이 집에서 만들어온 칠리를 놓고 대결하는 행사. 사실상 다양한 칠리를 무료로 맛볼 수 있는 기회였다. 남편은 모든 부스를 돌며 시식하고는 배를 두드리며 돌아왔다.

음식 가격은 착했다. 피자 3달러, 핫도그 3달러, 나초 2달러, 팝콘 2달러, 솜사탕 3달러, 음료수 1달러. 하지만 이 모든 걸 학부모들이 직접 만들어 팔아야 했다. 다행히 우리는 아침에 설치 작업을 했기 때문에 음식 판매는 면제였다.


오후의 하이라이트는 Cake Auction이었다.

학부모들이 정성스럽게 구워온 케이크들이 하나씩 경매에 올랐다. 평범한 초콜릿 케이크가 45달러, 3단 프린세스 케이크가 80달러에 낙찰됐다. 케이크 값이라기보다는 학교를 위한 기부금이었다. 다들 즐겁게 경쟁했고, 낙찰받은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케이크를 들고 갔다.




오후 4시, 축제가 끝나고 뒷정리가 시작됐다. 우리 가족이 축제 전에 미리 준비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처럼, 축제 후 뒷정리도 각자 맡은 담당 학부모들이 있었다. 호박들을 다시 차에 싣고, 테이블을 접고, 쓰레기를 줍는 모습을 뒤로 한 채 집으로 향했다.

차를 타자마자 엘리는 카시트에서 스르르 잠들었다. 손엔 작은 인형을 꼭 쥐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남편이 칠리를 너무 많이 먹어서 소화가 잘 안되는지 배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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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길. 온몸이 뻐근하고 어깨가 쿡쿡 쑤셔왔지만, 이상하게 기분은 좋았다. 한국에선 늘 유치원 행사의 '손님'이었다. 선생님들이 준비한 걸 구경하고, 사진 찍고, 박수 치고.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우리가 직접 만들고, 운영하고, 치운 축제였다.

새벽부터 일어나 일하는 게 쉽진 않았다. 하지만 엘리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이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기여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이게 미국식 품앗이구나. 모두가 조금씩 힘을 보태 함께 만들어가는 것.

"엄마, 나도 케이크 먹고 싶어!"

잠결에 중얼거리는 엘리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


조수석에 앉아 시원한 가을밤 공기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내년 가을 축제. 그때도 우리는 이렇게 새벽부터 호박을 나르고 있을까? 아니면 다른 역할을 맡게 될까. 음식을 만들거나 티켓을 나눠주는 일도 해보고 싶다. 오늘 우리가 축제를 즐길 수 있었던 것처럼, 다른 가족들도 그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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