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바라던 '나만의 시간'이 생겼건만, 결국 나는 마트를 돌고 있었다
"Mom, I'm ready!"
엘리가 가방을 메고 현관에 서 있다. 시계를 보니 8시 40분. 차로 15분은 걸리니까 서둘러야 한다. DPNS의 게이트가 열리는 시간은 정확히 오전 9시. 1분이라도 일찍 가봤자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그래도 엘리는 서두른다. 정문 앞 작은 뜰에서 친구들이 뛰어노는 걸 구경하고 싶어서다.
그리고 픽업 시간은 정확히 11시 45분. 이 철칙 같은 시간 약속은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한국에서라면 "조금 일찍 와도 되죠?" 하면서 눈치를 봤을 테고, 선생님도 "네, 괜찮아요" 하며 받아주었을 텐데. 여기는 달랐다. 9시는 9시고, 11시 45분은 11시 45분이다.
하지만 6개월을 지내며 깨달았다. 이게 바로 미국식 신뢰 시스템이구나.
은행 계좌를 열 때도 마찬가지였다. 서류 하나 빠트리면 "다음에 다시 오세요" 하며 칼같이 돌려보낸다. 하지만 모든 조건이 맞으면 그 자리에서 뚝딱 처리해준다. 겉으로는 엉성해 보여도 나름의 체계로 돌아가는 이 나라. 그 시스템에 우리도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었다.
그렇게 6개월이라는 시험 기간을 통과하고, 새로운 커뮤니티에 발을 들인 우리. 좌충우돌하며 적응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나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픽업과 드롭오프 시간을 뺀 두 시간이라는 자유가 생긴 것이다.
24시간을 샴쌍둥이처럼 붙어 지내던 엘리가 없는 시간. 처음에는 너무 허전했다. "엄마! 엄마!" 하며 끊임없이 부르는 목소리가 없으니 귓가가 이상하게 조용하다. 땡깡쟁이에 고집쟁이가 사라지니 몸이 갑자기 하늘로 날아갈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무엇을 하지? 뭘 해야 하지?'
DPNS에 두고 온 엘리가 잘 지내고 있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동시에 '나만의 2시간'이라는 자유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니. 얼마 만인가.
그래서 처음 한 일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추천했던 Co-Op 가기였다.
Whole Foods를 몰아내고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는 Davis Co-Op. 우리가 흔히 아는 파머스 마켓 같은 곳이다. 뭔가 협동조합이라서 싸게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 갔는데...
아, 이게 바로 미국의 '유기농 환상'이구나.
모든 제품이 유기농이라 가격이 후덜덜했다. 토마토 하나에 3달러, 우유 한 통에 7달러. 환율 1300원을 곱하면서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김에 기념으로 커피 한 잔을 샀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빌린 '파친코'를 꺼냈다. 당시 애플TV에서도 방영 예정이라 화제였던 그 책.
엘리는 내가 책을 읽을 때마다 귀신같이 나타나서 훼방을 놓곤 했다. "엄마 뭐해?" "엄마 나도 봐!" "엄마 이거 뭐야?" 끝없는 질문 공세. 그래서 아이와 떨어져서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이 바로 이거였다.
캘리포니아의 좋은 날씨 아래, 노상에서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것.
한 페이지, 두 페이지... 아,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여유인가. 선자가 이삭을 낳고 혼자 고생하는 대목에서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나도 타국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어서일까.
하지만 그 로맨틱한 자유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 날, 다시 두 시간의 자유가 생겼을 때 나는 깨달았다. 현실적으로 엘리가 없을 때 3인 가족의 식량을 찾으러 다니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걸. 세 살배기를 데리고 마트에 가면 직원들이 친절하게 대해주고, 엘리는 스티커나 막대사탕을 득템해서 기분 좋아하지만, 나는 1분도 쉬지 않고 대화해야 해서 온전히 쇼핑에 집중할 수 없었다.
"엄마 이거!" "엄마 저거!" "엄마 사줘!"
끝없는 떼쓰기와 협상의 연속. 장 보는 시간의 절반은 엘리를 달래는 데 썼다.
더군다나 새크라멘토에 있는 일본인 마켓도 한 번 가보고 싶었다. 생선조림도 먹고 싶었고, 된장이 떨어져가고 있었고, 김치 담글 고춧가루도 필요했다. 그래서 시작된 혼자만의 마트 도장깨기.
Davis Co-op, Trader Joe's, Costco, Oto's, Pedrick Produce, Safeway, Target, TJ Maxx...
월요일엔 Trader Joe's에서 냉동식품을, 화요일엔 Pedrick Produce에서 싱싱한 야채를, 수요일엔 Costco에서 대용량 육류를 사는 식으로 동선을 짰다. 어디가 비싸고 싼지, 어디 물건이 좋은지 머릿속에 지도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Oto's에 두부 세일해요!" "Pedrick에 복숭아 나왔어요. 완전 달아요!"
놀이터에서 만난 Miyo라는 일본 친구와는 거의 매일 이런 정보를 주고받았다. 정말 든든한 grocery mate였다. 미국 생활 10년 차인 그녀는 어디서 뭘 사야 하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
그야말로 식구들의 삼시세끼를 책임지는 주부가 된 것이다.
뭔가 거창하게 '자유시간'이라고 했지만, 결국엔 살림하는 시간. 파친코를 읽으며 커피를 마시던 첫날의 로맨스는 온데간데없고, 나보다 큰 장바구니를 끌고 마트를 누비는 아줌마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카운터에서는 늘 "Do you need a help? They are really heavy"라고 물어보면 "Of course! I am a mom!!"하며 씩씩하게 걸어나왔다.
그리고 엘리가 "엄마 이거!" "엄마 저거!" 하며 난리를 치지 않으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혼자 생각할 수 있고, 혼자 결정할 수 있고, 혼자 한숨 쉴 수 있는 시간.
이게 바로 온전한 자유였다.
데이비스 마트 생존 가이드
- Trader Joe's: 냉동식품과 와인이 최고. Everything but the bagel 시즈닝 필수템
- Costco: 고기와 과일 가성비 최고. 대용량(bulk-up)으로 사야할 땐 무조건 여기서
- Oto's Marketplace: 일본 마켓이지만 한국 식재료도 많음. 점심때 나오는 도시락이 맛있다
- Davis Co-Op: 비싸지만 품질 보장. 신선하고 건강한 식재료를 원하면 Co-Op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