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온천마을 '슈젠지(脩善寺)'에 있는 료칸에서 1박을 할 예정이다.
호텔조식을 간단히 먹고 오전 9시쯤 호텔에 캐리어를 맡기고(내일 다시 호텔로 돌아올 예정) 가벼운 차림으로 출발했다.
햇빛이 살짝 가려진 쨍하지 않은 날씨에 기온도 20도로 여행하기 딱 좋은 날씨.
시즈오카역에서 슈젠지역까지는 철도로 약 2시간가량 소요된다. (철도요금 :1540엔)
시즈오카는 여행객들 대부분 후지산을 보기 위해 오지만, 날씨가 조금만 흐려도 후지산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호락호락하지 않은 후지산'이란 말이 있다.
그런데 전철을 타고 조금 가다 보니 갑자기 창밖에 후지산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현실감 없는 후지산의 등장에 이렇게 공짜로 막 봐도 되나 싶어 옆에 앉아계신 할머니께 여쭤봤다.
"おばあさん。すみませんが、あれが富士山ですか。
할머니~ 저게 후지산이에요? "
"そうそう。今日はよく見えるね。
맞아 맞아. 오늘은 아주 잘 보이네~ "라고 하신다.
뭔가 아침부터 횡재한 기분이었다.
오늘 여행은 뭔가 잘 풀릴 것 같은 예감.
슈젠지역에서 내려 버스로 10분(260엔), 온천마을에 도착하니 오전 11시가 조금 넘었다.
료칸의 체크인은 3시라 시간이 많이 남아 미리 계획해 둔 식당부터 가보기로 했다.
'사쿠다(さくだ)라는 길거리 포장마차 같은 소바집인데 '나 혼자 산다' 이시헌 시즈오카 여행 편에 소개돼서 유명해진 곳이다. '소바 코스요리'라는 이름으로, TV에 소개될 당시 단돈 '500엔'이었다.
가게 안에 쓰여있는 안내문을 보니 '나 혼자 산다' 방영 때보다 100엔이 올라 600엔이 되어있었다.
그래도 너무나 저렴한 가격이다.
유명한 집이라 대기줄을 예상했는데, 다행히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자리가 하나 남아 있었다.
앉아있으면 알아서 해 주신다고 한국어로 안내문이 쓰여있길래 별다른 주문 없이 그냥 앉아있었다.
자리에 앉는 순간 또 시선집중. 역시 여자 혼자 여행은 이상해 보이나?
사장님은 이상스럽게 발음을 굴리시며 "Are you KOREAN?이라고 영어로 물어보시고,
나는 "はい。韓国人です"라고 일본어로 대답하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지자, 옆에 있는 일본 노부부가 하하 웃으시며 다시 물어보신다. "그런데 혼자 왔어요? " 그렇다고 하니, "왜 혼자 왔어요?" 하신다.
역시 혼자 여행 온 여자를 이상하게 생각하시나?
조용히 여행하고 싶어서 혼자 왔다고 대답 했더니
"すごい~!素晴らしい~!
어머~멋지네~ "
라며 칭찬해 주신다.
일본 분들은 어딜 가나 참 친절도 하시다.
드디어 순서대로 음식이 제공됐다.
첫 번째 코스가 제공되기 전 사장님이 '생고추냉이 뿌리와 강판'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시면서, 열심히 갈고 있으라고 하셨다.
고추냉이를 다 갈고 나니 사장님이 가져가시더니 갓 삶은 면 위에 고추냉이를 올려주셨다.
한국에서는 이런 비주얼의 면을 먹어본 적이 없어서 맛이 궁금했다.
고추냉이를 면에 조금 올려서 먹어보았다. 면에 살짝 소금이 뿌려져 있어 심심하지 않으며 고추냉이랑 너무 잘 어울렸다. 그리고 일단 소바면 자체가 너무 맛있다. 탱글탱글 그 자체.
첫 번째 코스에 대한 만족으로 두 번째 코스는 어떤 것이 나올지 더욱 기대가 됐다.
이번에는 삶은 면에 쯔께멘(찍어먹는 면)처럼 찬 쯔유국물을 자작자작하게 부어주셨고, 그 위에 깻잎 비슷한 잎사귀 튀김 하나를 올려주신다. 잎사귀 이름도 들었는데 내 머리가 기억을 하지 못한다. 으이구..
아무튼 이건 아는 맛인데도 더 맛있었고, 튀김도 갓 튀겨내 바삭했다.
사장님과 노부부는 번갈아가며 한 번씩 나에게 물어보셨다.
"맛있어요? 괜찮아요? " 입에 맞아요?
여러분~ 누가 보면 제가 여러분 집에 놀러 온 줄 알겠어요.
일본 노부부는 외국인이 혼자 일본 와서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시는지,
먹는 중간중간마다 내 표정을 살피셨다.
난 본의 아니게 계속 음식에 대한 리엑션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美味しい~。 うまい~。" 손으로는 엄지 척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맛있다고 표현해야 했다.
그런데 정말 맛있긴 했다. 다만 눈치 보며 리엑션 하느라 조금 피곤했을 뿐.
두 번째 코스를 거의 다 먹어갈 무렵, 사장님이 갑자기 내 소바그릇을 빼앗아 가신다.
'어? 아직 국물 다 안 먹었는데~~요? '라고 말하려고 했더니 'NO NO~ 다 먹으면 안 돼요'라고 하신다.
내가 밥그릇 뺏긴 강아지처럼 아쉬운 표정으로 앉아있으니 조금 뒤 세 번째 코스가 나왔다.
내 그릇을 왜 가져 가신지 이제 이해가 되었다.
두 번째 코스에서 조금 남아있던 쯔유국물에 이번엔 팔팔 끓는 면수를 부어주신다.
거기에 향긋한 유자껍질을 다져서 넣고 흰색 실파채를 넣어주신다.
이게 정말 소바코스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만큼 예술이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유자향과 적당히 간이 되어있는 면수가 여행의 피로를 풀어줄 만큼 깊은 맛이었다.
이렇게 세 코스로 요리는 끝이 난다. 아~ 참 담백하다.
600엔에 이렇게 소바 코스요리를 먹을 수 있다니 가성비 최고고 맛도 너무 훌륭했다.
다 먹은 뒤 계산을 하고 사장님께 사진을 부탁드렸더니 이렇게 포즈를 잡아 주신다.
식사를 마친 뒤 인사를 하고 나오려니 옆 좌석에 계시던 노부부가 당부의 말을 잊지 않으신다.
"부디 좋은 여행 하시고~ 여기는 시골이라 밤 되면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니 조심하세요~"
여기서도 나의 안전을 걱정해 주시는구나. 너무 감사한 말씀이었다.
나는 '사쿠다 소바'에서 점심을 먹으며 비로소 혼자 하는 여행의 매력 하나를 발견했다.
혼자 여행을 하고 있으면 혼자 다니는 여행객이 외로울까봐 현지인들이 먼저 말을 걸어준다는 사실.
낯선 여행지에서 건네받는 따뜻한 관심과 걱정은 한국에서 느끼는 친절과는 또 결이 달랐다.
비록 잠깐의 인연이고 스쳐 지나가는 대화일지라도, 그 배려 어린 한마디가 내 마음을 단단히 지켜주는 힘이 될 것 같았다. 덕분에 여행 내내 '나는 혼자여도 안전하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었다.
계획한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만족감, 가성비 훌륭한 맛집 방문에 성공한 뿌듯함, 그리고 노부부가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까지.. 그 모든 것이 한데 모여 마음 가득 온기를 채워주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계획을 완수했다는 뿌듯함에 취해 앞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예상치 못한 사건’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다음 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