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잠을 자고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떴다.
하늘은 아직 희끄무레했고 료칸의 복도에는 고요함만이 흐르고 있었다.
료칸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마음을 달래주고 싶어 새벽 온천장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의 온천은 어젯밤보다 더 좋았다.
수증기 사이로 쏟아지는 새벽의 빛, 물 위로 반사되는 하늘, 그리고 고요히 숨 쉬는 나.
마치 온천장을 전세 낸 듯 혼자만의 호사였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행복이란 게 별것인가.. 지금 이 온도, 이 고요함이면 충분했다.
온천욕을 마치고 향한 곳은 ‘키쿠야’의 아침 식사.
전날 밤 가이세키 정식을 먹을 때 미리 신청해 둔 양식메뉴였다.
하나같이 영양소를 생각해 알차게 구성되어 있고 맛은 깊었다.
마지막 한입까지 '극진히 대접받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시간과 돈이 허락한다면 이곳에 이틀쯤 더 머물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식당을 나왔다. (비수기 1박 요금: 38만 원/석식, 조식포함)
아쉬움을 뒤로하고 료칸을 나와 후지산을 만나기위해 ‘후지노미야역’으로 향했다.
슈젠지에서 약 두 시간 가량의 철도 여행.
창밖으로 흐르는 풍경을 보니 구름이 조금씩 두터워지고 있었다.
후지산은 언제나 날씨에 따라 그 모습을 허락한다.
후지노미야에 도착했을때 희미한 구름 사이로 어렴풋이 빛이 스며드는 흐린 날씨를 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나타나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첫 번째 목적지는 시라이토(白糸) 폭포.
‘하얀 실타래의 폭포’라는 이름처럼 푸른 숲 사이에서 새하얀 물줄기가 '신선의 수염'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한참을 넋을 놓고 서 있었다.
사진도, 영상도 그 감동을 담지 못했다. 단지 눈과 마음에 새길뿐이었다.
‘폭포 멍’이라는 말이 있다면 아마 이런 기분일 것이다.
다음 목적지는 ‘타누키 호수’.
일본 천 엔짜리 지폐 뒷면에 나와있는 바로 그 후지산 명당자리다.
버스에서 내리자 향긋한 풀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길게 조성된 산책로에는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가족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그 풍경 속을 눈으로 따라가며 15분쯤 걸었을 때 드디어 호수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후지산은 흐릿하게만 보였다.
마치 구름 속에서 장난을 치듯 희미하게 윤곽만 드러내고 있었다.
“혹시 저게 후지산인가요?”
사진을 찍던 일본인 가족에게 묻자,
“네, 평소엔 저기 숲 사이로 아주 선명하게 보이는데 오늘은 아쉽네요.”
그들이 웃으며 대답했다.
순간 깨달았다.
첫날, 철도에서 우연히 본 후지산도 얼마나 나에겐 큰 행운이었는지를.
후지산은 원래 그렇게 쉽게 허락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바로 아래 사진은 내가 찍은 사진이고 그 아래 사진은 원래 후지산이 잘 보이는 날의 사진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후지노미야역으로 돌아온 나는 미리 찾아둔 장어덮밥집 ‘우나텐’으로 향했다.
쉬지 않고 걸어 다녔더니 배가 심하게 고픈 상태였다.
골목길을 따라 15분쯤 헤맨 끝에, 가정집 같은 외관의 작은 가게를 발견했다.
주인 부부는 다정했고, 사모님은 서툰 한국말로 “혼자 여행왔어요?” 하며 말을 걸어주셨다.
소소한 사장님 내외와의 대화 덕분에 혼자서도 따뜻한 식사가 되었다.
장어덮밥의 맛은 말이 필요 없었다.
겉은 바삭, 속은 부드럽고 양념은 너무 짜지도 달지도 않게 완벽했다.
'역시 장어덮밥은 일본이다.'
마지막에 살짝 느끼함이 밀려올 즈음엔 김치생각이 간절했지만, 3일째 여행으로 지친 몸엔 이보다 좋은 보양식이 없었다.
저녁이 되어 시즈오카로 돌아왔다.
편의점에서 하이볼 한 캔과 컵라면을 사 들고 호텔 방으로 향했다.
컵라면을 앞에 두고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 혼자만의 여행도 끝나가는구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반, 며칠 더 있고 싶은 마음 반이었다.
내일은 벌써 여행의 마지막 날,
오후 3시 비행기이기 때문에 오전엔 꼭 가기로 마음먹었던 함박스테이크집에 가려고 한다.
10시 오픈인데 9시부터 대기자 명단에 넣어놔야 오픈런으로 기다리지 않고 먹을 수 있다고 한다.
"꼭 먹어봐야지"
하이볼을 한 모금 마시며 무릎을 주물렀다.
하루 종일 걸은 탓에 다리가 조금 아팠다.
여행은 역시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다녀야 한다는 말의 의미가 실감 났다.
계획했던 후지산 관람은 실패했지만 묘하게 뿌듯하고 행복했다.
작정하고 간 날은 결국 후지산을 보지 못하고 방심하고 있을때 우연히 찾아와 주었던 후지산이 오히려 고맙게 느껴졌다.
- 다음 회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