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막스 베버, 제러미 벤담 Max Weber, Bentham
진우는 강원도 정선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가을 산맥은 붉고 노랗게 물들어 있었고 굽이치는 길을 따라 안개가 천천히 흘렀다. 버스 창밖으로는 석탄 산업의 흔적이 사라진 마을들이 보였다. 탄광이 문을 닫은 뒤 이곳엔 카지노가 들어섰다. 버스가 정선 터미널에 도착하자, 진우는 택시를 타고 카지노로 향했다. 도로 옆엔 작은 모텔과 식당들이 줄지어 있었고 “행운을 잡으세요”라는 색 바랜 간판이 옛날 영화의 소품들 같이 부자연스러웠다. 택시가 언덕을 오르자 웅장한 건물이 나타났다. 바로 강원랜드 카지노였다.
카지노 입구 앞에 익숙한 초상의 두 인물이 다른 관광객들과 함께 서 있었다. 검은 외투 차림에 엄격한 눈빛의 막스 베버와 요즘 보기 힘든 작은 주판을 들고 만지작거리며 미소를 짓고 있는 제러미 벤담이었다. 진우도 그 뒤에 줄을 서서 그들을 따라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친 베버에게 말을 건넸다.
진우: “여기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내국인이 들어올 수 있는 카지노입니다.”
베버: “나는 벌써 불편하오. 이럴 거라 예상했지만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절제와 근면을 강조하기에 도박자체는 그 정신에 반하는 일이니...”
벤담: “그러나 나는 묻고 싶군요. 사람들이 여기서 느끼는 쾌락이 고통보다 크다면 그것은 정당화될 수 있지 않은가요?”
진우: “절제와 쾌락이라... 이 안에서 의미를 찾아보죠. 오늘의 대화는 흥미롭겠네요.”
세 사람은 카지노 홀 안으로 들어갔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천장에 걸려 있었고, 룰렛과 슬롯머신 불빛이 번쩍였다. 사람들의 환호와 한숨이 뒤섞였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섞여있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베버: “이 화려함은 노동이 아닌 우연을 통해 얻으려는 욕망의 산물이군. 근대 자본주의 정신은 이렇게 허물어지는가?”
벤담: “하지만 보세요. 그들의 얼굴에 웃음이 있군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삶의 무게를 잊을 수 있으니... 그것 자체가 바로 쾌락이니...”
진우: “웃음 뒤에 눈물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요?”
한 여성이 슬롯머신에 동전을 넣고 손잡이를 잡았다. 화면이 돌고, 세 개의 기호가 줄을 맞췄다. 순간 환호성이 터졌다.
벤담: “거 봐요! 저 짧은 순간의 엄청난 쾌락의 총량을...!”
베버: “그러나 그녀가 만일 돈을 잃었다면 잃은 돈은 노동의 대가일 것이오. 노동의 신성함이 우연에 탕진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인류의 아니 저 여인의 인생적인 퇴보일 테니.”
벤담: “손해가 크다면 떠나면 되는 법이죠. 그러나 자발적으로 머무는 이상, 그것은 자유의 선택이죠.”
진우: “자유와 절제 중 꼭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흑백논리 같아요. 회색도 다른 색도 있을 텐데...”
그들은 룰렛 테이블로 이동했다. 딜러가 공을 굴리자, 사람들의 눈동자가 공의 궤적을 쫓았다. 빨간 칸에 멈추자 함성이 일었다.
벤담: “나는 이 장면을 공리의 계산으로 보고 있죠. 다수의 쾌락이 커진다면 사회는 그만큼 행복할 테니...”
베버: “아니오. 이 게임은 체계적 중독을 낳을 것이오. 근대 자본주의 정신은 합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도박은 합리성을 파괴할 테니.”
벤담: “합리성만으로는 인간이 숨 쉴 수 없죠. 누구에게나 즐거움이 필요하니.”
베버: “즐거움이 절제를 넘어서는 순간, 인간은 노예가 되겠군.”
진우: “자유로운 쾌락과 절제의 노예화라... 두 길이 맞서고 있군요.”
벤담: “그렇다면 자네가 생각할 때는 한국인들은 카지노를 어떻게 바라보는 것 같나요?”
진우: “많은 이들이 여기서 희망을 찾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몰락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대부분 인간이 카지노를 이길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고, 나는 다르다는 것도 전제하고 있죠.”
베버: “그 몰락이야말로 내가 우려하는 바이네. 절제 없는 삶은 결국 몰락을 불러올 뿐이지.”
벤담: “그러나 만약 그들의 쾌락이 마지막 희망이라면 그것을 막아야 할까요? 희망은 언제든지 지켜야 하죠.”
진우: “희망과 몰락 사이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길을 고르는군요.”
셋은 잠시 카지노 내의 빈 벤치에 앉았다. 가장 사람의 왕래가 없는 조용해 보이는 빈 벤치였지만 많은 관광객들의 소리와 시끄러운 기계소리들이 서로의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베버: “나는 카지노를 근대의 타락이라 보네.”
벤담: “나는 카지노를 쾌락의 가능성이라 보고 있죠.”
베버: “도박은 생산성을 갉아먹는 악일 뿐이네.”
벤담: “그러나 도박은 삶을 잠시 해방시킬 수도 있어요.”
베버: “절제 없는 자유는 파멸로 가는 길이네.”
벤담: “쾌락 없는 절제는 감옥이라는 점도 잊으면 안 되죠.”
진우: “파멸과 감옥, 절제와 자유, 쾌락... 인간은 언제나 갈등하는군요.”
창문 밖은 강원도의 밤이 내려앉았다. 카지노에는 전통적으로 시계와 창문, 거울이 없다. 화장실을 제외한 강원랜드의 내부도 그러했다. 그러나 밤이 되니 카지노 내부의 불빛이 상대적으로 더욱 밝아진 것 같이 보였다.
베버: “이 불빛은 노동 없는 부의 환영이네.”
벤담: “이 불빛은 잠시라도 사람들에게 삶을 견딜 힘을 줄수도 있죠.”
진우: “같은 불빛이지만 한쪽은 환영이고, 다른 한쪽은 위안이군요.”
세 사람은 조명과 사람들 사이의 소음에 피로감을 느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홀 밖으로 나와 산바람을 맞았다. 아마도 카지노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감정을 숨기지 않아서 그 감정을 받아들이기에는 함께 감정이 섞이지 않은 그들은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카지노의 불빛은 여전히 뒤에서 번쩍임을 느낄 수 있었다.
베버: “나는 강원랜드에서 절제의 윤리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소.”
벤담: “나는 강원랜드에서 쾌락의 계산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죠.”
진우: “저는 오늘 인간이 절제와 쾌락 사이에서 끊임없이 저울질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답은 아마도 두 저울을 함께 보는 데 있을 겁니다.”
두 인물은 무언가 할 말이 남은 듯 살짝 밤안개가 낀 산책로로 함께 대화를 나누며 걸어갔다. 진우는 잠시 멈춰 간단한 인사를 하고 사라지는 베버와 벤담을 눈에 담에 두었다. 호텔의 숙소로 돌아온 진우는 샤워를 하고 침대맡에 베개를 등에 대고 기대어 누웠다. 아직 강원랜드 안의 불빛과 사람들의 소리는 씻기지 않고 귓가를 맴도는 것 같았다. 호텔창 밖으로 멀리 보이는 산책로에는 베버와 벤담의 실루엣이 아직 남아있는 듯 느껴졌다.
“강원랜드...
베버는 절제의 윤리를 말했고, 벤담은 쾌락의 계산을 말했다. 나는 오늘 인간이 파멸과 위안 사이에서 늘 길을 고른다는 걸 알았다. 카지노의 안과밖에서 반짝이는 수많은 불빛들은 환영과도 같았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위안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성공이라는 것은 우연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돈과 성공이 일치한다면 재벌들이 왜 자살하기도 하는가... 권력이 성공이라면 권력자들은 왜 하나같이 감옥에 있을 확률이 높은가... 아마도 성공이란 자기의 인생을 온전히 자기가 정할 수 있을 때와 그렇게 살아온 시간이 길어져 인간으로서의 최후의 수명에 다가갈 때 그때만이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가 오면 본인과 본인 주변에 남은 타인을 통해 성공의 여부를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