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프리드리히 실러 Friedrich Schiller
맑은 봄바람이 강릉역 플랫폼 위로 스쳤다. 진우는 KTX에서 내려 시내버스를 타고 초당순두부 거리를 향했다. 따뜻한 햇살 아래, 초당순두부 아이스크림의 부드러운 단맛이 혀에 녹았다. 거리를 벗어나 경포호로 향하는 길, 물비늘이 반짝이는 호수가 점점 가까워졌다. 산책길 한쪽, 오래된 나무 벤치가 햇빛을 담고 있었다.
진우는 배낭에서 단팥빵을 꺼냈다. 갓 구운 듯 따끈한 향이 퍼지는 순간, 단정한 금발의 남자가 조용히 다가와 옆자리에 앉았다.
실러: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의 결단이지.”
진우: “사랑을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군요...”
실러: “그래... 이런 날씨에 사랑을 이야기하는 건 좋지.”
진우: “사랑은 가슴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요?”
실러: “감정에서 나오는 사랑은 바람결처럼 쉽게 흔들린다네.”
진우: “흔들린다고 해서 가치 없는 건 아니잖아요.”
실러: “아니지. 하지만 아름다움 속에서 생긴 사랑은 이성과 자유를 향한다네.”
진우: “이성과 자유... 그게 사랑이라고요?”
실러: “사랑은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존재를 인정하는 자유의 행위인 건 분명하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같은 한 모금이어도 실러는 느리게 진우는 조금 빠르게 마시는 것 같았다. 둘 사이의 시간은 미묘하게 다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진우: “아름다움이랑 사랑이 무슨 관계가 있죠?”
실러: “아름다움은 욕망과 도덕 사이의 다리지. 예술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처럼 사랑도 자유를 완성시킨다네.”
진우: “그럼 아름다움 없는 사랑은 불완전한가요?”
실러: “감정만 있는 사랑은 불안정하지. 아름다움이 그 사랑을 자유롭게 만들기 때문이지.”
진우: “그럼 자유롭게 만든다는 건 뭘 의미하죠?”
실러: “상대를 소유하지 않으려는 것. 그의 자유를 지키면서 나도 더 나아지는 것이네.”
진우: “대부분의 사랑은 소유하려는 경향이 있죠.”
실러: “그건 사랑의 본능이 아니라 불안의 본능일세.”
진우: “불안을 없앨 방법은 뭡니까?”
실러: “상대의 자유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관계를 지키는 법을 배우는 거지.”
진우: “그게 가능해요?”
실러: “가능하다고 믿는 순간부터 인간은 윤리적인 존재가 된다네.”
차갑지만 온화한 바람이 호수 위를 지나 물결을 일렁였다. 진우는 커피를 내려놓고 빵을 집었다.
실러: “윤리적 사랑은 상대를 목적 그 자체로 존중한다네. 칸트가 말한 것처럼.”
진우: “목적 그 자체라... 사랑에서도 철학이 필요하군요.”
실러: “철학보다 사랑은 가장 깊은 윤리 수업이지. 감정만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네.”
진우: “그럼 감정은 필요 없는 건가요?”
실러: “필요하지. 하지만 감정만으로는 자유를 지킬 수 없네.”
진우: “현실에서 그런 사랑은 드물죠.”
실러: “드물기 때문에 더 가치 있는 거라 할 수 있지.”
진우: “그러면 사랑은 노력해야만 유지된다는 뜻입니까?”
실러: “사랑은 스스로 흐르게 두되 방향을 잃지 않도록 돕는 게 바로 의지이지.”
진우: “그건 장자가 말한 무위에 가까운 건가요?”
실러: “무위처럼 보일 뿐이지... 그건 표현하지 않았지만 깊은 선택의 결과이네.”
조용하다고 생각했던 경포호에 갑자기 다양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칵테일파티 효과처럼 실러와의 대화가 잠시 멈추자 자연의 모든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새의 소리, 산책하는 사람의 소리, 심지어는 같은 바람이 호수의 물결에 부딪혀 만들어 내는 소리,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 그러나 실러가 다시 질문을 하자 모든 자연의 소리는 사라지고 온전히 실러의 목소리만 들렸다.
실러: “예술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면 사랑은 그 자유를 완성시키는 거다.”
진우: “예술이 자유를... 사랑이 완성이라.”
실러: “사랑 없는 자유는 고독하고 자유 없는 사랑은 속박이네.”
진우: “둘 다 함께 해야 온전하군요.”
실러: “그래야 인간이 인간답다네.”
늦은 오후의 햇살이 호수 위에 길게 드리워졌다. 벤치 뒤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렸다. 진우는 남은 단팥빵을 실러에게 건넸다.
실러: “달콤하군. 하지만 사랑은 이보다 더 달콤함을 오래 남아야 하지.”
진우: “어떻게 하면 그렇게 남길 수 있죠?”
실러: “자유를 주는 거네. 그 자유가 돌아오면... 그게 진짜 사랑이야.”
실러는 무심하게 엉덩이의 먼지를 털고 있어 났다. 열 걸음 넘게 호숫가 길을 따라 걸어가다 갑자기 뒤를 보며 진우에게 손을 흔들었다. 진우도 가볍게 목례를 하며 답례로 손을 흔들었다. 차갑게 식은 남겨진 빵과 커피를 마셨다. 경포호의 호수만큼 멋진 하늘의 구름들을 보며 생각했다.
'강릉 경포호. KTX와 버스를 타고 온 길, 초당순두부 아이스크림의 부드러움이 아직 입안에 남아 있었다. 호수 옆 벤치에서 마신 강릉커피의 쌉쌀함, 바람에 흔들린 나뭇가지, 그리고 실러의 말. 사랑은 단순한 끌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대를 자유롭게 하려는 나의 의지였다. 나는 자유 없이 한 사랑이 있었는지, 자유롭게 할 만큼 사랑한 적이 있었는지...' 진우는 평소보다 오래 생각했다. 호수 위에 물오리 떼가 거닐고 있었다. 새끼오리의 사랑은 무조건 적이었나? 내게도 사랑이 오리의 첫 마음처럼 각인되어 평생 지워지지 않고 머물러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