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니체 Nietzsche, Friedrich Wilhelm
제주공항에 내려 렌터카를 빌린 진우는 해발이 높아질수록 달라지는 공기를 느끼며 영실 탐방로 입구에 섰다. 등산복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 가방 속에 오메기떡과 백록담 생수를 넣었다. 곶자왈의 짙은 녹음 속에서 바위틈으로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바람 속에는 바다의 소금기와 숲의 흙내가 섞여 있었다. 능선 위 작은 쉼터에 도착한 진우는 숨을 고르며 바위에 앉았다. 그곳에는 짧은 콧수염과 회색 외투, 깃이 높은 셔츠를 입은 남자가 있었다. 그의 복장은 산행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나 그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절벽 너머를 보며 말했다.
니체: “고통은 오르막길의 다른 이름이지.”
진우: "산을 오르기에는 너무 불편한 복장이지 않나요?”
니체: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진정한 초인은 복장으로 막을 수 없지...”
두 사람은 함께 능선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멀리 선 구름이 능선을 타고 밀려왔다.
진우: “초인이란 뭔가요? 그냥 강한 사람인가요?”
니체: “강한 자는 고통을 사랑하는 자다. 자기를 스스로 만든 자지.”
진우: “고통은 대부분 피하려 하잖아요.”
니체: “그래서 대부분은 절벽 아래 머무르지.”
진우: “절벽 위로 올라가면 뭘 볼 수 있죠?”
니체: “내 안의 낯선 나를 보게 되지.”
진우: “그게 무서우면요?”
니체: “무서움을 껴안는 것이 초인의 첫걸음이지.”
해발이 오를수록 숨이 가빠졌다. 바람은 얼굴을 칼날처럼 스쳤다.
니체: “자네 시대엔 고통을 어떻게 대하나?”
진우: “최대한 줄이려 하죠. 약이나 기술로요.”
니체: “그건 병을 숨기는 거지... 치유하는 게 아니네.”
진우: “하지만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나요?”
니체: “고통은 도약의 발판일세. 없는 자는 뛰어오르지 못한다네.”
진우: “모두가 초인이 될 필요는 없잖아요.”
니체: “그렇지. 초인은 선택이 아니라, 부름에 응답한 자네.”
안개가 짙어져 시야가 좁아졌다. 발아래 절벽이 흐릿하게 가려졌다.
니체: “자네는 지금 왜 정상으로 가고 있나?”
진우: “보기 위해서요. 위에서만 볼 수 있는 걸.”
니체: “그 ‘위’라는 건 고도인가, 아니면 상태인가?”
진우: “둘 다일지도요.”
니체: “그럼 내려가도 그 상태를 지킬 수 있나?”
진우: “자신은 없어요.”
니체: “하긴... 그래서 인간은 반복해서 오르는 거지.”
정상 부근에 도달하자 구름이 걷히고 백록담이 거대한 옥빛 그릇처럼 드러났다. 물 위에 햇빛이 부서져 작은 별들이 일렁이는 듯 보였다. 진우는 가방에서 오메기떡을 꺼내 니체에게 건넸다.
진우: “이건 초인이 먹기엔 좀 말랑한가요?”
니체: “초인은 단단한 것만 먹는 자가 아니네. 부드러움도 꺼리지 않는 자지.”
둘은 감귤도 까서 나누어 먹고 삼다수 생수로 목을 축였다.
니체: “네가 지금까지 묻는 철학은 네 삶 그 자체다. 그러나 철학자는 책이 아니라 발자국으로 말해야지.”
진우: “발자국이라... 이 길이 기록이군요.”
니체: “맞네. 그리고 초인은 자기 길을 스스로 만든다네.”
둘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리막에서 바람이 등 뒤를 밀었다. 먼바다와 제주 시내가 동시에 시야에 들어왔다.
니체: “자네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을 얼마나 부수나?”
진우: “오히려 지키려 하죠. 안전하고 편안하게.”
니체: “그건 성장보다 보존을 택한 것일세.”
진우: “보존하면 안 되나요?”
니체: “보존만 하면 썩는다네.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하지.”
진우: “새로워지는 건 두렵습니다.”
니체: “두려움 없이 초인은 탄생하지 않는다네.”
탐방로 입구가 보이자, 니체는 걸음을 멈췄다. 그는 멀리 산등선을 가리켰다.
니체: “오늘 너는 높은 산을 올랐네. 내려간 후에도 그 높이를 잊지 말게.”
진우: “그 높이는 제 다리에 남아 있을 겁니다.”
니체: “그렇다면 다음엔 더 가파른 길을 찾게.”
니체와의 강렬한 만남 이후 돌아오는 진우가 내뱉는 숨에는 평소의 공기가 아니라 다른 것이 가득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제주, 그리고 한라산... 초인은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고통 앞에서 스스로를 초대하는 사람이다. 오늘 나는 숨이 차고 무릎이 떨릴 때, 오히려 마음의 떨림은 사라짐을 느꼈다. 아마 진정한 초인이란 자신의 나약함도 인정하며 자신의 한계를 진정으로 아는 진실한 모습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