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하양 2

- 나의 도(道)는 여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by 전영칠

3.

박승훈 교수의 영미문학 시간.

박 교수는 헨리밀러의 '북회귀선'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헨리와 헨리의 아내 준, 부유한 은행원 남편을 둔 헨리밀러의 애인 아나이스, 그리고 준과 아나이스와의 동성애, 이런 복잡한 서로의 관계를 파리 방랑생활에서 헨리밀러는 일기를 썼는데, 그것을 토대로 탄생한 것이 그의 자전적 소설인 '북회귀선'입니다.


-19세기말,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파격적인 그의 소설은 자유로운 감성과 작가적 영혼을 불어넣은 문학적 성과일까요, 아니면 세상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소설이라는 양껍질을 뒤집어쓴 가정 파괴자의 혼란하고 난잡한 자백일까요?


박교수는 그 당시 '까만 새'라는 장편소설로 돈을 벌었다. 30만 권이 팔렸다.

그는 문과대학 내에서 이단 작가로 통한다. 그는 기독교인이면서 자유로운 성 개방론자이다. 그는 결혼을 하든 않든 남녀 간의 성에 대해서는 윤리 이전에 감성과 자유로움을 중시한다. 아, 나는 정통보다는 이단이 좋다. 보수보다는 진보가 좋다. 나는 피 끓는 20대!

현직 교수이면서 현직 소설가라는 직함(나는 그 당시 소설가나 시인이라는 존재는 무조건 경원하고 있었다)과, 기독교가 가르치는 보수적 시각과 그가 살고 있는 가정생활에 있어서의 모순됨, 파격의 진실됨 등등을 분석하기 위해 나는 그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는 목소리를 돋우었다. 헨리밀러와 한패로군. 나는 중얼거리면서도 흥미 있게 그의 열강을 듣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박 교수와 나는 학교 앞에서 점심 식사시간을 같이 하였는데, 손바닥만 한 화분 하나를 들고 빼곡하게 들어 차있는 그의 서재를 방문하면서부터 점심때 소주 한잔 하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창밖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을 보며 나는 잠시 후 지희와의 약속을 가슴 설렘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어떨까, 박 교수와 함께 식사하면서 그녀를 소개하는 것이. 그녀와 나와의 궁합 자문도 들어보고 말이지.

창밖에 눈이 엄청 엄청 내리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건국대학교 앞에는 어린이대공원이 있다. 지금은 이곳저곳을 구분하여 여러 시설물들을 설치하여 놓았기 때문에 넓지 않아 보이지만, 당시의 어린이대공원은 어느 기업체 골프장을 인수한 상태로 어느 정도 원형이 유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잔디밭이 무척 넓었다. 당시 우리 또래에게 어린이대공원에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녀석들은 바보로 취급되었다. 나는 익숙한 자태로 어린이대공원의 담장을 넘었다. 담을 넘자 마치 지평선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드넓은 만주벌판의 지평, 그곳에 그녀가 있다!

오늘은 그녀와 뽀뽀하는 날- 나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작정하였다. 그리고는 그녀를 찾아 놀이터로 힘차게 발을 디뎠다. 미어터지는 오월 어린이날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사람하나 없는 놀이터의 철물들 사이, 아, 주먹덩이 같이 퍼붓는 눈들 사이로 우산 쓴 그녀가 아련히 보였다. 나는 먹이를 앞에 놓은 하이에나처럼 침을 꿀꺽 삼켰다.


-먼저 왔네?

-숙녀를 기다리게 해 놓고 그 뭔 소리!

-미안 10분 늦었으니 벌로 1분에 한 번씩 뽀뽀를 하면 안 될까? 뽀뽀란 게 참 힘든 거거든.

-웃겨.

그녀가 어림없다는 듯 흥흥거렸다.

-그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 뭐랄까, 잠깐 그대에게 소개할 분이 있어.

-소개할 분? 그게 뭔데.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내가 존경하는 교수님 한 분.

-어머 싫어.

-뭐 어때. 밥이나 같이 먹자고.

다짜고짜 그녀의 손을 잡고 공원 내 약속장소로 끌었다.


-자, 건배.

인사 소개를 끝내자마자 박교수가 소주를 한잔씩 따랐다.

-나이팅게일이라고 들었어요.

-아, 네.

-이 친구 순진하고 착해요.

박교수가 잔을 들며 말했다.

- 아, 네.

- 게다가 직진 고진이고 또 성실한 요즘 보기 드문 청년이에요.

- 아, 네.

그녀답지 않게 고분고분하기는. 그러면서도 그 말이 나는 싫지 않은 나는 '칭찬 좀 더요.' 라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나는 잔을 단숨에 마셨다.

- 내가 알기로 이 친구는 연애경험이 풍부하지 못하니 처자가 리드 좀 해줘야 할 거요.

웬 처자? 나는 박교수를 바라보았다.

- 아, 네?

전라도 말로 뭐라고라? 하는 모습으로 말 꼬리 끝이 치켜져 올랐다.

- 제가 연애경험이 많은 것처럼 보이시나 보죠?

그녀는 할 말 하면서도 호호하며 웃음으로 제 말을 마무리하는 센스를 보인다.

- 아 뭐, 그런 뜻이 아니고 내가 보기에 처자가 더 솔직하고 용감하고 적극적인 성격인 것 같아 보이니 하는 말이에요.

- 아름다운 나이인 만큼 미래에 대한 불투명성으로 방황도 간간이 할 나이이지만, 방황이란 맛이 덜 들어 있을 뿐 간을 맞추기 위한 시고 떫은 조미료와 같은 것이니, 시간이 지나면 그것도 좋은 밑 걸음 아니겠어요? 사람이 세상 살며 가장 아름다운 때가 20대이니 예쁘게 만나 봐요. 필요하다면 내 주례라도 설 용의가 있으니.

- 에이, 교수님도.

나는 ‘말이 좀 길어지시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주례 운운 하는 말에 화들짝 놀라 박교수에게 말했다.

- 연애라면 장안의 고수인 내가 자네 맘을 몰라? 자, 한잔하고 자리 비워줄 테니 멋지게 한번 해봐.

박교수가 소주잔을 들었다. 박교수는 한잔 이상 먹는 법이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한잔, 밥 먹을 때마다 반주로 한잔- 그러나 그것으로 전부다. 상대방에게는 그 이상 더 따라 주는 법이 없다. 나는 처음엔 그게 아쉬웠으나 한잔의 술에도 술 분위기가 달아오를 수 있다는 것을 박교수를 통해 알게 되었다. 돌아서서 음식점을 나가는 박교수의 등 뒤로 눈이 무더기로 어른거리고 있었다.


4.


OIG4 이이미지로.jpg


-너 이런 시 아니?

-웬 시?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어디서 듣던 시네?

그녀가 관심을 보인다.

러시아, 나타샤, 눈 덮인 벌판을 연상시키는 흰 당나귀, 아니 백색의 들판을 가르고 달리는 열차.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가 저쪽 어린이 대공원 후문쯤, 눈과 얼음 투성이인 집에서 운명의 연인 라라가 잠든 것을 보고 난 후 손뼉을 치며 늑대를 쫒고 그리고 책상에 앉아 시를 쓰는 장면. 아,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 그 장면이 떠올랐다.


-백석 시인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인데 이 시를 이렇게 읊으면 어떨까.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지희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재밌네?

그녀가 모처럼 분위기를 탄다. 나는 이 때다 싶어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좋아?

-음, 좋아.

그녀가 내게 가만히 안겼다. 이런 젠장. 나도 무언가가 되는구나. 나도 되기는 되는 놈인가 봐. 오늘은 분위기 잡는 것으로 작전을 마무리해야 돼, 암.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상구 얼굴을 떠올렸다. 내일 상구에게 말해야지, 그래서 그런지 이상하게 눈물이 나려고 한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그녀에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전화도 안 되었다. 이 뭐지? 밥 잘 익고 있는데.

나는 그녀가 근무하는 병원으로 찾아갔다.

병원 3층 간호원들이 근무하는 카운터에서 한 두어 번 본 적 있는 동료 간호원에게 그녀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 지희 오늘 근무날이지요?

- 지희요?

- 네. 지희요.

- 어머, 몰랐어요? 그녀가 옆의 동료를 보며 내게 말했다.

- 뭐가요?

- 지희 … 사고 났어요.

- 사고라니요? 그녀가 옆 동료의 허리를 찔벅대며 말했다.

- 네가 얘기해. 역시 한 두어 번 본 적 있는 옆의 간호사가 말했다.

- 죽었어요.

- 죽어요?

어처구니없게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었다는 거였다. 이런 제길.

나는 병원을 나와 길을 걸었다. 뒤통수에서 하얀 불같은 것이 지나갔다.

이런 된장 같으니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라는 말만 자꾸 되풀이하였다.

길가에 앉아 잠시 앉아 있다가 박교수 연구실을 찾았다.



-어떡하지요?

-어떡하긴. 어쩔 수 없지.

그는 인생 달관자라도 되는냥 별 것 아니듯 말했다.

- ……

잠시 무엇인가 생각난 듯 그가 물었다.

- 그 아가씨 오빠가 목사라 했지?

- 예.

- 오빠를 만나봐.

- 다 끝났는데요.

나는 갑자기 그녀의 큰 유방이 떠올랐다. 이런 젠장.

- 왜요?

- 오빠에게 물어봐. 구원이 뭡니까?

억울했다.

- 무슨 소용이지요, 그 게?

- 물어봐 구원이 뭐냐고. 자네는 궁금하지도 않아? 중간에 죽었는데 말이지.

그는 위엄 있게 말을 이었다.

- 알았어요. 나는 끌리듯 말했다.


일주일 후 화곡동에 있는 그녀 오빠의 교회를 찾아갔다. 개척한 지 8년 되었다고 했다.

- 하나님을 사랑했는데 왜 하나님이 불러갔을까요?

연탄을 갈고 뚜껑을 2~3미리 덮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21세 꽃다운 나이로 그녀는 그렇게 세상을 떴다.

- 다 이유가 있을 겁니다.

오빠 목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옆에 목사의 부인이 보였다.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수수하고 평범해 보였다.

- 그녀가 구원받았을까요?

- 그렇습니다. 목사가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 구원이 무엇입니까? 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 교회를 다녀봐야 압니다.

- 얼마나 말입니까?

내가 생각해도 내가 아마도 바보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목사에게 물었다.

- 정확히 말은 할 수 없지만 1년 이상은 다녀봐야 합니다.


5.

사고 3일 후 그리고 나와의 4개월 짧은 인연을 끝으로 그녀는 눈처럼 하늘하늘 벽제의 하늘로, 연기로 모락모락 이 땅을 떠나갔다.

그로부터 나는 집에서 1시간 반 걸리는 화곡동까지 매주 일요일 그 교회를 다녔다.

교회라면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에 빵 타먹으려고 다닌 것이 전부인 나는 말하자면 그렇게 교회와의 인연을 시작한 것이다.


내게 눈처럼 다가와 눈 녹듯 금방 사라진 존재, 하양.

그녀는 늘 잘도 웃었다. 별 것 아닌데도 흥흥 거리며 웃었다. 형형색색을 뽐내는 지구촌 인간계. 그중에 온갖 비린내라는 비린내는 다 풍기는 인간세계의 색깔들을 모조리 웃음으로 윤색하고 화학변화하려 드는가 싶더니, 그녀는 이른 봄의 겨울 찬바람처럼 홀연히 떠나버렸다.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지는 것도 자연의 이치가 맞아야 한다. 그런데 어찌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지상에 태어난 의미가 없을까. 그녀가 이 땅에 온 것, 잠시나마 나와 스치듯 사라져 간 그 의미는 뭐였을까. 머지않아 나는 그중 한 가지만은 알게 되었다. 내게 처음으로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닌,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계로의 입문을 선사하고 간 이가 그녀였다는 사실을.

그 가교 역할을 해주고 그녀는 펄펄 날아갔다. 하양으로, 하얗게. 라라처럼.



OIG2.jpg




* 소설은 대학시절부터 쓰기 시작했습니다만, 브런치에서는 이 장르를 처음 올려봅니다.

댓글과 좋아요는 광막한 사막속 목 마른 형국에서, 제게 시원한 물을 건네는 분을 만난 것과 같습니다.

저 역시 열심히 댓글과 좋아요로 격려 드릴까 합니다. 제 글 읽어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keyword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