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 그리고 이념과 신앙 사이
- 무엇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그녀는 잠시 말을 골랐다.
-무슨 말이든 좋아. 듣겠어, 궁금하기도 하고.
그녀가 녹차 찻잔을 차탁에 살짝 얹었다.
- 아버지가 광주에 사세요.
- 그래? 혹시...
- 아버지는 광주 토박이예요.
그녀가 띄엄띄엄 그러나 차분하게 말을 이으며 가정 이야기를 했다.
- 아버지는 광주 시가지로 들어가는 광산군 길목에서 오토바이 수리점을 했지요. 먹고살기에는 지장 없는 정도였고요. 작은 아버지는 인근 광주천과 극락천 사이에서 농사를 하며 쌀과 채소를 양동시장에 내다 팔고 살았어요. 서로 왕래가 잦았고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우애가 좋았다는 기억이 많이 나요.
그런데 작은 아버지가 결혼 후 6년 만에 간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이야기가 연결된다고 보기에 집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네요.
- 집안 이야기는 쉽지 않을 것인데 그렇게 말해주니 내가 고맙지. 더 듣고 싶어.
요한은 그녀와 부모 형제들이 광주 출신이라는 말에 마음을 집중하며 말했다.
- 작은아버지가 너무 일찍 돌아가셨네.
- 술을 좋아하셨지요. 그것이 원인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아빠도 술을 좋아하셨는데 아빠는 지금도 건강하세요. 하기야 작은 아버지가 술은 더 많이 드시는 것 같았어요.
- 작은 아버지는 자녀는 몇 명이나 두셨나?
- 그 얘기를 좀 하려고요.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 사이에 네 살 된 아들이 하나 있었어요. 그런데 사별 2년이 되지 못해 사건이 벌어졌지요.
-?
작은 어머니가 이제 농사는 할 수 없으니 땅을 처분해 양장점을 하나 차리겠다고 했어요. 처녀 때 양장점에서 옷을 만들어 파는 일을 했거든요. 땅을 정리하고 그러고 나서 우리 집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아들을 데리고 목포로 열차를 타고 갔어요. 그리고 목포 애린원 고아원 입구 옆 철망 한쪽에서 아이에게 사탕을 물려주고 나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그대로 종적을 감췄어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이의 주머니에 아이의 이름과 생년월일도 적어 넣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작은 어머니가 작은 아버지 돌아가신 1년 후부터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지요.
아버지는 '자식을 내버린 독한 년'이라며 엄청 분노하셨어요. '그년은 사람도 아니다!'라면서 요.
- 와, 그런 일이 있었군!
요한은 고아원 철문 앞에서 아이의 손에 쥐어준 눈깔사탕이 다 녹아 끈적해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을 엄마를 기다리며,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엄마가 사라진 골목길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4살짜리 아이의 눈망울을 잠시 그려보았다.
- 30대를 넘기기 전에 재혼하려니 아이가 걸림이 된 거지요. 당시의 시대에는 남의 씨 달린 여자는 재혼 후보감으로 쳐다도 안 봤으니.
- 아이가 무슨 죄야.
- 아이는 죄가 없지요.
-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
그녀에게 물을 한 잔 건넸다.
- 아버지가 '분명히 가까운 도시 고아원에 내다 버렸을 것이다'라며 인근 도시를 뒤지기 시작했어요. '아이는 내가 키운다'라면서 함께 찍었던 사진이 한장인가 있었는데 그것을 들고 다니며 순천, 나주, 목포 고아원을 뒤졌지요. 2개월이 채 안 돼 아이를 찾았어요. 아이 이름과 생일, 왼쪽 손목에 있는 나무에 찔린 상처도 찾는데 도움이 되었지요.
-......
- 아버지가 고아원 원장실에서 행정적 절차를 사무적으로 이야기하는 원장에게 책상을 내리치며 말했대요. "핏덩이를 내다 버려? 그게 에미가 할 짓이야! 당신에게 말 하는 게 아닙니다. 무엇보다 얘는 내 핏덩이입니다!" 그리고 꼬질꼬질해진 조카를 번쩍 안아 들었답니다. "가자. 오늘부터 니 이름은 내 아들이다."라고 하면서요. 그 당시 고아원은 아이들이 넘쳐났고 아이를 키우겠다고 하는 사람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고 하네요. 아버지는 그동안 키운 양육비와 거마비 정도를 쥐어 주고 아이를 집으로 데려 왔어요.
그리고 동사무소 직원에게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몰래 건네며, 출생신고 서류를 밀어 넣었데요. "집사람이 몸 풀고 신고가 늦었소. 날짜는 이걸로 해주시오."라고요.
- 아, 그런 일이 있었군. 내가 다 할 말이 없어. 입양이었었을까?
- 지금이면 허위신고이기도 한 데 아버지는 '친생자신고'를 택했어요. 아버지가 이 아이를 내 호적에 '내가 낳은 아들'로 올려버린 것이지요.
병원에서 낳지 않고 집에서 낳았다고 하고, 동네 동장이나 친구 2명의 도장으로 인우보증(隣友保證)만 갖추면 출생신고를 받아주던 시절이었다고 해요. 아들 없는 우리 집에서 내게도 1년 차 남동생이 생긴 것이지요.
그 당시의 행복했던 시절이 떠오른 것일까, 그녀가 살짝 웃음을 보였다.
-그런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