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 데이지와 민들레

들꽃같은 글이 되길 바라며

by 다민

한옥 근처에서는 날씨가 풀릴 쯤이면 노란색 민들레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언 땅이 녹아 온기가 느껴지는 것을 제일 먼저 알아채고 인사하는 들꽃이다.


민들레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봄의 인사를 건네곤 했다. 기왓장 사이에도, 시멘트 사이에도, 딱딱한 서울의 아스팔트 바닥에서 조차 기어이 인사를 건네는 꽃.


강인한 생명력으로 피는 그들의 노오란 얼굴을 바라보면 아무리 추운 겨울, 얼어붙은 동네에도 봄이 온다는 것을 기어코 알아채게 만든다.




프랑스에 도착하니 어두운 밤이다.


'치안이 그렇게 안 좋다던데.'라는 뉴스를 하도 봐서인지 공항과 호텔 사이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경계심을 너무 높여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몸보다 큰 3개월간의 짐을 잃을까 캐리어를 꽉 쥔 손은 축축하게 땀이 찼다.


긴 비행으로 인한 피로감과 어두운 밤거리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곳이 낯선 땅이라는 다른 공기를 알아채기도 전,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져 잠들었다.


도망치듯 떠나온 프랑스.




이곳에 오기 직전, 함께 미래를 계획했던 연인과 헤어졌고 내가 살던 한옥 근처에는 시민들의 분노가 매일 같이 우렁차게 터져 나왔다. 나 역시 주말에는 안국역과 국회 앞에서 목이 터지도록 소리치고, 한동안 목소리가 나오지 않곤 했다. 탄핵소추가 좌절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는 절망감에 휩싸였던 날들.


우리의 세상을 무너뜨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다시, 다시 밖의 거리로 나갔지만, 내 안의 세상이 무너지는 순간에는 나는 어디로도 갈 수 없었다.




몸이 달라진 시간과 땅을 알아챘는지 귀신같이 티를 낸다. 새벽시간 또랑한 정신으로 창 밖을 보니 그제야 내가 다른 땅에 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기다란 활주로 끝을 붉게 물들이는 새벽녘을 바라본다. 저 너머를 건너 이곳에 도착했구나.


돌처럼 굳어진 몸으로 걸어왔던 어제의 길이 창문 아래 보였다. 눈이 부시게 찌르는 주황빛 볕이 하얀 데이지 꽃들에 흐드러지게 반사된다. 어제는 몰랐는데 길가에는 데이지가 가득 피어있다. 새벽녘 길가로 내달렸다. 이곳에도 들꽃이 있구나.


땅 위에 피어난 들꽃을 본다. 말끔하게 만들어진 인도 옆 잔디 사이에 잔뜩 핀 데이지 꽃. 역시나 시멘트 사이에, 딱딱한 공항 바닥에서도 인사를 건네는 너희들.


강인한 생명력의 꽃 말을 가진 데이지.

불굴의 의지의 꽃 말을 가진 민들레.


겨울이 스며든 언 땅이 가득한 마음에 기어코 틈을 만들어 인사를 건넨다. 어디에나 들꽃은 핀다. 알아채려 하지 않아도 그저 내 맘에 파고드는 순간이 있다.


파리 북 역에서, 2025. 01. 28



'서른 넘어 도망친 80일의 프랑스'는 삶을 모두 포기하고 싶을 때, 마지막 힘을 짜내어 도망쳤던 지난날을 기록한 글입니다. 몸은 무겁고, 머리는 더 무거워서 프랑스에서 지낼 때도 침대 밖으로 나오기 어려웠었는데요. 그때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마음을 기록하고, 눈에 담고 있는 풍경을 적어나가곤 했어요.

저마다 모두 사연이 있으니까요. 여러 어려운 날들을 겪어내고 살아내는 분들에게 따뜻한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경험했던 그간의 기록을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글재주가 좋진 않아서 걱정이 됩니다. 솔직한 마음 하나를 믿고, 부끄럽지만 지난 프랑스에서의 하루하루를 보여드릴게요.

머리말로 소개한 '데이지와 민들레'는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처음 쓴 글입니다. 늦은 밤 파리 공항 근처 호텔에 도착한 뒤, 시차적응을 못해 새벽에 저절로 떠진 눈으로 만난 데이지는 저에게 큰 위로가 되었어요. 먼 타지에서 만난 익숙하고 반가운 들꽃의 인사는 여행의 시작에서 정말 큰 힘을 줬거든요. 아마 맞이해 주는 데이지가 없었다면 이후 프랑스에서의 시간이 마냥 즐거웠다고 느끼진 않았을 것 같아요.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쳐있는 순간에 만난 작고 하찮은 그 존재가 저에게는 무엇보다 큰 울림을 줬거든요. 파리 북 역 한편에 앉을자리를 잡자마자, 캐리어를 책상 삼아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담았던 글이랍니다.

완벽한 별천지는 없다 보니 도망쳐온 이곳에서 지내면서도 여러 일을 겪었었는데요. 그때마다 왜인지 불쑥불쑥 데이지 꽃이 나타나더군요. 자꾸 무너지는 마음을 어떻게 귀신같이 아는지, 마트 가려고 걷다가도 빼꼼, 하루 종일 울다 나오면 정원에 잔뜩 얼굴을 또 빼꼼. 자연의 강인한 생명력이 자꾸만 저에게 무슨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았어요.

사적인 기록인지라, 작고 보잘것없는 이 기록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라는 고민도 했는데요.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저도 한번 빼꼼 해보려고요. 프랑스에서 만났던 데이지 꽃처럼, 여러 마음들에 빼꼼 만날 수 있는 들꽃 같은 이야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럼 매주, 목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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