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범생이었다.
늘 열심히 했고, 잘했고, 당연히 계속 남들보다 잘할 줄 알았다.
건방지게도.
2학년 말이 되면서 실내디자인 실습 시간에 실내건축기능사 자격증 준비를 시작했다.
평면도, 입면도, 천장도 그리고 투시도.
모두가 처음 접하는 도면 그리기.
늘 그랬던 것처럼 나는 잘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도, 선생님도.
그리고 다가온 모의시험.
중간 점검이다. 무조건 완성만 해라.
그것이 선생님의 주문이었다.
주어진 시간은 5시간.
시간을 꽉 채워 고개 한번 들지 못하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결과는 시간 초과.
평면도도 마무리를 못했던가?
나는 도면에 너무 세세하게 신경 쓰다 완성까지 가지 못했고, 완성하지 못한 아이들은 실습실 뒤에 줄줄이 엎드려 매를 맞았다.
더 충격적인 건 늘 나보다 못하다고 여겼던 아이들이 도면을 전부 완성한 것이었다.
중간중간 놓친 부분도 있고 미흡한 것은 사실이지만, 완성을 시켰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 아이들도 얼떨떨한 얼굴로 줄줄이 벌서는 아이들을 바라봤다.
늘 혼나는 건 자기들 몫인데 왜 바뀐 건지 이해를 못 하는 얼굴이었다.
혼나는 아이들도, 칭찬을 받은 아이들도 서로 같은 표정이었다.
'이게 뭐야?' '이게 맞는 상황이야?'
오만한 모범생은 나무에서 떨어져서 많이 아팠다.
엎드려뻗친 자세로 벌서는 것도 아팠고, 엉덩이를 파이프로 맞는 것도 아팠지만, 가장 아픈 건 자존심이었다.
감정을 꾹꾹 눌러 참으며 자존심을 세우던 그날의 내 밑바닥을 이 일기에서 볼 수 있었다.
11월 9일
실내시간 내내 혼나고 맞고, 소묘는 소묘대로 안 되고…
실내시간엔 속으로 몇 번이나 울었지만 얼굴 한번 안 찡그리고 계속 웃었어.
선생님의 재미없는 농담에도 억지로 웃었지.
애들 앞에서 그런 걸로 울거나 약해지는 모습 보이기 싫었어.
11월 21일
내일 실내시간에 또 맞겠다. 아님 꾸중...
난 실내시간이 있는 월요일이 제일 악몽 같아. 빨리 지나가 버렸으면 좋겠다.
학교수업 몇 개 잘해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어떤 것이든 나는 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남보다 위에 서 있다는 오만방자한 생각이 당연하게 뿌리내려 있었다.
그렇게 오만한 모범생은 나무에서 떨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져 보고서야 알았다.
실패했을 때의 기분.
최선을 다해도 안 됐을 때의 기분.
교실 바닥에 엎드려 매를 맞고 친구들을 바라볼 때의 기분.
나보다 못한다고 얕잡아 봐선 안 되는구나.
내가 더 잘한다고 우월한 것은 아니구나.
누가 잘할지, 누가 못 할지 정해진 것은 없구나.
떨어진다는 것은 아프고 창피했다.
아이들의 시선을 피해 숨고 싶었다.
선생님의 실망 섞인 한숨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도, 선생님도 수군거리는 것만 같았다.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교실 뒤에서 바라본 친구들은 칭찬받지 않아도 묵묵히 노력하고 있었다.
모두 다 노력하고 있었구나.
나만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구나.
수군거리는 것은 내 마음에서 만들어 내는 소리구나.
창피하다고 숨으면 앞으로 계속 창피할 일만 생긴다.
지금 있는 곳이 바닥이라고 해도 한 걸음씩 올라가면 되는 거다.
그때부터 나는 이를 갈았다.
복수할 거야....! 누군지 모를 누군가에게.
으아아아....!
나 혼자 분노로 이글거리며 새벽까지 손을 놀렸다.
제도용 책상이 없어 밥상에 기다란 'T'자 모양 자를 붙여놓고 삼각자를 움직이며 도면을 그렸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후, 일기에는...
3월 22일
투시도 하나에 왜 5시간이나 걸리는 걸까? 도무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어제 3시 30분쯤에 잤다. 잠이 부족해…
제발 투시도까지만 갔으면 좋겠다. 컬러링까지 가면 더 바랄 게 없고.
몇 시간 후의 내 모습을 보고 싶다. 아무래도 또 맞고 있겠지…
참, 슬프다. 어쩌겠어? 그냥 맞아야지.
맞는 건 그다지 겁나지 않는데, 내 실력이 맞아야 할 실력이라는 게 비참하다.
1학년때는 실습으로 맞는 일 같은 건 없었는데...
열심히 하면 늘겠지. 그치?
방과 후도 하니깐…
*
정말로 몇 시간 후의 나.
안 맞아서 너무 기쁘다!
허리도 아프고 피곤하지만 뿌듯하기도 하고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네.
근데 눈에 열이 넘 많다. 계속 열나니까 입술이 튼다.
오만한 모범생은 나무에서 떨어졌지만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감기몸살로 입술이 터지면서.
그 해, 나는 실내건축기능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했다.
안되면 되게 하라!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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