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0월 24일.
참! 1999년 4월 1일부터 썼어 일기. 갑자기 생각이 나네.
참 오래됐다. 엊그제 네가 음성에 일기 쓰자고 제안했던 것 같구나.
그때는 정말 신기했어. 나도 이런 걸 쓸 기회가 다 생긴다고…
근데 지금도 신기해. 너랑 친해졌다는 게.
너랑 이렇게 친해질 거라곤 상상도 못 했었는데….
- 네가 쓴 일기
내가 너에게 음성메시지를 남겼었나 보다.
같이 일기를 쓰자고.
그때까지만 해도 삐삐 음성메시지를 쓰던 시기였나 보다.
기억에는 전혀 없지만 우리가 남겨둔 기록은 이렇게 말하는구나.
내가 입학할 즈음에는 삐삐로 음성메시지를 남기고 숫자로 영문메시지를 남기는 때였다.
'I MISS YOU -> 1177155400'
1은 영문자 I를 뜻하고, 177은 M, 5는 S, You를 뜻하는 4는 삐삐의 디지털 숫자 표기로 보면 소문자 y모양이다.
추억 돋네...
삐삐 음성메시지를 들으려면 유선전화가 있어야 한다.
나는 일기를 쓰자고 음성을 남기고, 친구는 유선전화 수화기 너머로 내 목소리를 듣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던 때였다.
하지만 세상은 점점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타택이 보이기 시작했다.
교복 입은 학생이 버스에서 휴대폰을 꺼내 통화를 하면 아이들은 몰래 흘끔거렸다.
비싼 휴대폰이네... 자랑하나...?
휴대폰은 학생이 가지기에 비쌌지만 그만큼 매력적이었다.
최신기기를 향한 아이들의 사랑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삐삐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반면 PC방은 어마무시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메일이 뭔지도 모르던 나는 반 친구의 손에 이끌려 PC방에 처음 갔더랬다.
친구는 스타크래프트를 하러 가는 길이었고 나는 그날 처음 메일 계정을 만들었다.
친절한 친구의 도움으로 만든 그 계정이 지금까지 쓰고 있는 한메일 계정이다.
그때쯤에는 나도 어느새 모범생 무리가 아닌, 다른 무리의 아이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리고 있었다.
내 메일 계정을 함께 만들어 준 친구는 바지가 쫄바지 마냥 줄여져 있었고 담배냄새가 진동을 했다.
장난은 짓궂었지만 내 걱정과 달리 무서운 아이들이 아니었다.
알고 보면 그저 자유분방할 뿐.
참 고맙게도, 그 자유분방함을 나 같은 겁쟁이에게 물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나 그랬듯, 나 역시 변화하는 세상을 그 친구들과 함께 적응해 갔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시기.
삐삐, 휴대전화가 공존하고, 노래테이프나 플로피디스크가 CD로 바뀌어가고, 비디오테이프 대여점과 만화책방이 사라져 가던 시기(만화책방은 지금도 어느 정도 살아남아 있지만).
통신과 문화의 물리적 형태가 바뀌어가는 시기였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삐삐를 보고 우리가 떠올리는 것은 작고 네모난 기계만은 아닐 것이다.
호출을 보내고 전화를 기다리는 마음, 숫자 암호를 보내고 두근거렸던 마음.
그 기다림과 설렘을 덧씌우며 누군가를, 언젠가를 떠올리겠지.
기기의 변화가 빠른 만큼 추억할 수 있는 그 순간도 짧아져간다.
짧은 시간에만 존재했던 물건들은 그 시기를 함께한 사람들을 그 물건에 박제해 버린다.
유행처럼 지나가는 통신기기와 그보다 짧았던 친구들과의 시간.
그 시간에만 존재하기에 의식하지 못한 사이 내게도 소중한 물건이 되어버렸다.
불현듯 눈에 보이는 그 시절의 물건들은 그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