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쉽게 무너질까 – 감정 트리거의 작동
연애 중 유난히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있다.
함께 웃던 순간도 있었고, 설렘으로 가득했던 날들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오래도록 선명하게 남은 장면들은 '감정이 무너졌던 때'였다.
감정은 한순간에 무너지지 않고, 늘 조심스럽게 무너졌다.
드라마처럼 거창한 장면은 없었다.
내가 무너졌던 기억들을 떠올려 보면, 대부분 작고 사소한 장면들이었다.
그날은 그냥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
여느 날처럼 만나 카페에 앉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나는 이야기를 건넸고 그는 핸드폰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게 대답했다.
문득, 그의 시선이 내 얼굴이 아니라 테이블 위를 향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저 피곤해서 그럴 수도 있는데, 나는 그 조용한 무심함에 숨이 턱 막혔다.
말을 멈춘 나에게 "왜?"라는 질문이 돌아왔고,
나는 "아니야"라고 웃으며 말했지만 속에서는 조용한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혼자 있는 느낌이 들었다.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멀리 있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 사람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또 다른 날이었다.
하루 종일 연락이 없던 그가 밤늦게 "미안, 바빴어"라는 단답을 보냈다.
그 짧은 문장을 읽고, 나는 가슴 한쪽이 쓰라렸다.
이유 없는 불안이 아니라, 익숙한 침묵이 반복되는 것에서 오는 실망감이었다.
그날 밤 나는 잠에 들지 못했다.
'이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건 나만 느끼는 걸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고, 나중엔 "왜 그러는 거야?"라고 묻고 싶어졌다.
하지만 묻지 못했다.
상대의 마음을 확인하는 일은, 때때로 내 마음이 망가지는 일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너졌던 순간들의 공통점은
무너짐이 큰 사건이 아니라 작은 변화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말투가 달라지고, 응답 속도가 늦어지고, 표정에서 따뜻함이 빠졌을 때,
그 모든 게 내게는 '사랑이 식었을지도 모른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어떤 날은 사소한 말다툼이 있었다.
서로 감정이 올라간 상태에서 잠시 정적이 흘렀고,
그 사람은 "혼자서 조금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라고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말하고도 돌아서자마자 무너졌다.
마치 그 말 한마디가 곧 이 관계는 끝날 것이라는 신호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날 밤, 나는 휴대폰을 붙잡고 메시지를 보내려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기다리면 연락이 올까 봐, 너무 집착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혹은 정말 이별하게 될까 봐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침묵이 너무 무서웠고, 나는 결국 혼자 울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나 혼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감정이 무너진다는 건 그런 거였다.
누가 나를 싫다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 식었다고 말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그 분위기를 읽어버리고 혼자 붕괴되어 버리곤 했다.
심리학에서 이를 '감정 트리거(trigger)' 또는 '감정 붕괴 반응'이라고 부른다.
과거의 상처, 애정 결핍, 거절 경험 등은 특정한 말이나 행동에 의해 쉽게 되살아난다.
특히 불안형 애착을 가진 사람은 작은 단절, 무심한 표정, 말투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것이 '버림받음'으로 연결된 과거 기억을 자극하면서 강한 감정 반응을 유발한다.
이는 실제 사건의 크기와 관계없이, 해석의 방식에 따라 감정이 증폭되는 메커니즘이다.
이러한 감정의 과잉 반응은 종종 '해리(dissociation)'와 연결되기도 한다.
감정 트리거가 작동하면, 의식이 과거의 기억이나 감정 상태로 잠깐 돌아가며
현재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왜곡되게 반응하게 된다.
또한, '내면아이(inner child) 이론'에 따르면,
이런 감정 폭발은 현재의 내가 아니라, 돌봄 받지 못한 과거의 '작은 나'가 반응하는 것이다.
즉, 지금 내가 서운해하거나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의 내가 여전히 외롭고 무서운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감정을 다루기 위해서는 '현재의 나'가 그 감정을 '해석'해주고 '달래주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한 번은, 감정을 억누르다 참지 못하고 "요즘 나한테 왜 그래?"라고 울먹이며 묻고 말았다.
그는 "그냥 피곤해서 그래"라고 했고, 나는 그 대답에 더 큰 상처를 받았다.
'그냥'이라는 말이 그 순간에는 '나는 여전히 똑같은데, 네가 괜히 예민한 거야'처럼 들렸다.
그날 나는 혼자 집에 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대에 앉아서 울었다.
그는 나를 위로하지 않았고, 나는 위로받고 싶다고도 말하지 못했다.
이런 기억들이 쌓이고 보니, 그동안 나는 언제나 무너지는 쪽이었다.
상대는 무심했고 나는 그 틈을 메우려다 지쳐갔다.
마음이 식은 것 같은 그 사람의 말투에, 웃음에, 공기 사이에, 수없이 상처를 입었다.
나는 그 틈을 감지했고 붙잡고 싶었다. 그래서 울었고, 소리쳤다.
결국 사랑이 나를 지탱해 주는 게 아니라, 사랑 때문에 매번 내 감정이 무너지고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사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나 자신을 너무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 감정을 건드리는 단서 하나에 사로잡혀, '사랑받지 못할 것 같은 나'로 금세 침몰해 버렸다.
그건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내 안의 '해석' 때문이었다.
나는 누군가의 짧은 말, 차가운 표정, 늦은 연락 안에 '사랑하지 않는 이유'를 너무 빨리 발견했다.
그리고 그 공포에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이제는 안다.
감정을 지키는 건 상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해석하는 나의 방식을 바꾸는 일이라는 걸
무너지지 않기 위해선, 관계를 바꾸는 게 아니라, 나 자신과의 관계부터 새로 맺어야 한다는 것
사랑 속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
이제는 내 마음을 지키는 연습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