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명함이 없는 나는 누구인가?

55년 만에 만난 나

by Mira

퇴직하고 나면 더 이상 직함이 없고 소속된 단체가 없어서 허전하고 공허하다고 하는 선배들이 많다.


나는 사회생화를 하는 30년 동안 회사에서의 ‘나’라는 자아가 차지하는 부분이 아주 적었다. 심지어 나는 리더들이 하는 평가에도 거의 관심이 없었다.


내가 어디 소속이고 그곳에서의 지위가 뭐다,라고 내세운 적이 거의 없다.


내가 놀란 건, 취미생활을 위해 모인 모임에서도 자신의 직업으로 자기를 소개하고 그 직함 그대로 불러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태도다.


회사 사장이면 대표님, 학교 교수면 교수님.

아니 자기가 그 회사에서나 대표고, 학교에서나 교수지, 나의 대표도 교수도 아니잖아? 그저 취미라는 공통점으로 만났을 뿐인데, 그 직함이 없는 순순한 개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게 신기했다.


내가 소속된 곳 말고

내가 느끼는 ‘나라는 감각’이 나는 훨씬 중요하다.


물론 일정 자격과 경쟁을 뚫고 만든 사회적 위치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아니다. 그건 긴 인생에서 지나가는 하나의 역할 일 뿐이라는 것이다.


밖에서 아무리 화려하고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도 홀로 빈방에서 자신과 마주쳐야 하는 순간이 있다. 누구도 나를 쳐다보지 않고 평가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는, 오직 나와 나만이 남는 순간. 그런 순간이 다정하고 평화롭기를 바란다.


내가 나를 셀프 검열하고 통제하고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목소리가 너무 커서 진이 빠지도록 힘든 날도 있었다. 무언가 대단한 도전과 성과가 없는 인생은 실패한 것 같고 부끄러운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괴롭히던 밤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나는 쓸모없고 모두를 실망시키는 그런 사람'

이라는 생각이 너무 극단적으로 달려드는 날에는 나 스스로 삶의 의미도 기쁨도 상실 한 채, '처형'을 기다리는 심정이기도 했다. 그런 생각에 함몰되면 정말 극단적인 일을 저지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런 마음이 짓누르는 고통을 끌어 안은채 <정신과>라는 간판이 보이면 다급하게 뛰어 들어가 진료를 요청했던, 지독하게 추운 겨울도 있었다.

정신이 물어 뜯기는 그런 기분.

그런데 정신과마다 2~3개월 전에 예약이 다 찾다는 대답만 들었다.


내가 나를 공격하면서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계절을 겨우 버티고 나서야 깨달은 게 있다. 인간은 원래 쓸모가 있으려고 태어난 것만은 아니다. 다만 자신의 쓸모를 찾으면서 존재의 당위를 세우려고 할 뿐.


그래서 나는 나의 쓸모를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존재'에서 찾기로 했다. 그런 노력이 쌓여서야 나는 거울로 내 얼굴을 바로 볼 수 있었다. 세상에 태어난 지 무려 55년이 지나서야.


나는 나 자신을 똑바로 볼 용기조차 없었다.


나는 내가 너무 못생겼다는 생각에 거울로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살았다. 그냥 대충대충 보면서 살았다. 조그마한 거울을 얼굴 가까이 대고 정성스레 화장을 하는 여자들을 보면 이상하고도 부러웠다.


누구를 위해 이뻐야 하나?

누가 그렇게 나한테 관심 있다고?

나는 나를 위해 이뻐지려고 노력하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향수를 뿌린다.

내가 나에게 정성스러워야 운명도 나에게 상냥할 거라 생각한다.


겨우 겨우 찾아가는 나와의 평화.

아직도 불안불안 한 순간이 많지만, 조심스럽게 가까이 가 본다.


명함에 쓰여 있는 이름을 나라고 믿고 살면 그 명함이 사라졌을 때 당황한다.

나는 내 마음으로 느끼고 맛보고 돌보는 손길에서 느껴지는 나를 나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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