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누군가 지금 바람 속에 서 있다면
그저 무사히 견디기를
그 마음 끝에 작은 햇살 하나 머물기를
나는 조용히 기도합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살아가지만 마음 한쪽이 묵직한 날들이 있다. 감정이 고요한 척하지만 내면 어딘가에서는 늘 무언가 아파오고 있다는 걸 안다. 아주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마음이 휘청이고 누군가의 무심한 한마디에 가슴속 바람이 요동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조용한 고통에 대해 말해보고 싶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고통을 이기는 방법이라는 건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겨내야 한다고 반드시 견뎌야 한다고. 하지만 고통이라는 건 이겨내는 대상이 아니라 그저 함께 살아내야 하는 무언가에 더 가깝다. 이기겠다고 결심하는 순간부터 이미 우리는 고통보다 작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그 다짐 속엔 고통이 나를 덮칠 수 있다는 전제가 들어 있고 나는 그것을 어떻게든 이겨내야 한다는 두려움이 조용히 숨어 있다.
바람이 저쪽에서 불어올 때 그 바람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피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저 그 바람이 벽에 부딪히고 나서야 약해진 기류를 맞을 뿐이다. 바람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속도와 강도가 줄어들 뿐 바람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고통도 그렇다. 희 노 애 락의 모양만 바꿔가며 늘 우리 삶 어딘가에서 숨 쉬고 있다. 한때는 기쁨이라 여겼던 것이 어느 날에는 쓰디쓴 고통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좋았던 인연이 한순간에 지독한 악연으로 남는 날도 있고 그 악연조차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래서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하고 이해하게 되는 순간도 온다. 그때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것도 다 삶이었구나 하고.
사랑이 특히 그렇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주고받았던 말들 눈빛 손끝 마음의 무게들 그 모든 것이 어느 날에는 따뜻한 추억이 되었다가 또 어떤 날엔 치명적인 고통의 조각이 되어 돌아온다. 그래서 어떤 사랑은 끝난 뒤에야 진짜 그 깊이를 알게 된다.
우리는 그걸 피할 수 없다. 고통의 바람이 불어올 땐 그 바람 앞에 고개를 빳빳이 들기보다는 차라리 자세를 낮추고 고개를 살짝 숙이고 그저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게 어쩌면 고통을 이겨내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이기겠다는 결심이 아니라 견디겠다는 태도. 그 차이가 사람을 무너뜨릴 수도 있고 살려낼 수도 있다. 어떤 고통은 이겨야 할 전쟁이 아니라 마치 한 철의 계절처럼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할 무언가일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 모두는 고통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아니 어쩌면 고통이라는 회오리 한가운데 서 있는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속으로는 고통의 바람을 껴안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건 꼭 눈에 띄는 울음이나 상처의 흔적이 아니더라도 그의 말투 그의 어깨선 그의 눈동자 안에서 조용히 느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다. 한쪽이 고통을 마주하면 그 고통이 관계를 조용히 비추기 시작한다. 서로가 어떤 거리에서 어떻게 응시하고 있는지 그 관계의 진짜 온도가 드러난다. 그리고 그 사람이 고통을 어떻게 대하는가. 그 삶의 태도는 그 사람의 전부를 보여준다. 감정은 숨길 수 있어도 고통을 대하는 자세는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고통은 결국 관계의 본모습을 드러내는 거울이 된다. 우리가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그 사람의 고통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남는지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고통은 그저 개인의 상처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도를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는 진실이다.
삶은 행복과 불행의 선을 그어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쁨에도 슬픔이 있고 슬픔 속에도 미세한 온기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중심을 세우고 흔들리는 바람 속에서도 뿌리를 붙잡은 채 묵묵히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요즘 그 바람이 하루라도 빨리 잦아들기를 내가 아는 모든 이를 위해 간절히 바라고 있다. 아무도 흔들리지 않기를 아무도 혼자 버티는 일이 없기를.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 한켠을 조용히 쓸어내리는 누군가가 있다면 부디 그 마음이 너무 오래 흔들리지 않기를.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이더라도 그 바람이 스쳐간 자리에 다시 따뜻한 햇살이 머물기를. 그저 그렇게 이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한 줌의 평안이라도 남기를. 나는 오늘도 조용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