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피어나는 스펠로
“또 스펠로?” 그는 그렇게 말했다. 말끝엔 약간의 웃음기가 섞여 있었고 나는 그 웃음을 처음 들은 날처럼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스펠로는 그냥 자꾸 가게 되잖아요. 그 이유를 모르겠는데도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잔을 들고 돌리던 손동작이 아주 미세하게 멈춘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나는 매년 이탈리아 출장길이면 어김없이 소도시를 쑤시고 다녔다. 특히 움브리아의 마을들은 이상할 정도로 오래 마음에 남았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 마을들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말 없이 향기처럼 스며드는 방식으로.
아씨시에서 추천을 받고 처음 스펠로로 차를 달렸던 날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마을 전체가 꽃향기와 트러플 향으로 가득했고 무채색의 벽돌 골목마다 화사한 꽃들이 어지럽게 피어 있었다. 나는 그 명징한 골목의 색채에 정말 매료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채도와 명도 높은 식물들을 테라스마다 꼭 알맞게 기를 수 있는지 감탄했고 마치 골목 자체가 정원이고 그림이었으며 사람들의 손길이 머무는 모든 자리가 하나의 연출 같았다. 햇빛이 내려앉은 골목 한가운데 고양이 한 마리가 조용히 낮잠을 자고 있었고 바람에 빨래가 천천히 나부끼는 그 아래로 아이들이 웃으며 달리고 있었다. 나는 멈춰 서서 그 풍경을 눈으로 꾹꾹 눌러 담았다. 그 중 한 아이는 나를 스쳐가다 말없이 멈춰 서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말도 인사도 없었지만 그 조용한 시선 하나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았다.
그 마을에서 기억나는 장면이 있어요. 나는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햇살 좋은 골목에 할아버지 세 분이 나란히 앉아 계셨고 내가 지나가자 활짝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그 중 한 분이 영어를 하셔서 우리는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에 오면 방을 내어줄게” 그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대가도 조건도 없이 누군가에게 방을 내어줄 수 있다는 말 그것이 그곳의 방식이라는 게 믿기지 않으면서도 참 따뜻했다. 그는 여전히 고요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잔을 손에서 놓지도 않고 시선도 떼지 않았다. 나는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지 몰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 또 한 명의 얼굴도 있다. 길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청년이 있었는데 내가 지나가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 인사도 표정도 없었지만 나는 그 눈빛이 말하듯 느껴졌다.
“당신 이 마을을 사랑하죠” 그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고 나는 말했다. “당신은 풍경보다 사람을 보러 다니는군요” 그가 처음으로 말을 던졌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여행은 풍경과 에피소드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는 여행을 통해 사람을 얻어요. 그곳을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건 늘 사람 때문이에요.”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 마음 어딘가에도 누군가의 이름 없는 얼굴 하나가 스펠로의 조용한 골목처럼 오래 머물고 있으리라는 것을. 아무 말 없이 스쳐갔지만 이상하게 잊히지 않는 눈빛. 다정한 인사 없이도 오래 머무는 기억. 스펠로는 그런 장면들로 가득한 마을이다. 그래서 나는 자꾸 그곳으로 돌아간다. 그 이유를 모르겠는데도 그냥 계속 가게 된다.
스펠로를 떠나던 날이었다. 마을 외곽의 작은 도로를 따라 달리던 중 경찰차가 느닷없이 차선을 막아섰고 두 명의 경찰이 내리더니 차를 세우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이유를 묻지 않고 조용히 창문을 내렸다. “여권 좀 볼 수 있을까요” 한 경찰이 정중한 말투로 요청했지만 그의 시선은 내 얼굴에서 내 손끝 그리고 다시 차 안쪽을 훑고 있었다. 그들은 여권을 확인하더니 서로 눈빛을 교환했고 그 중 한 명이 말했다. “차에서 잠시 내려주시겠습니까” 나는 벨트를 풀고 문을 열었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고 단호하게 말했다. “걸어보세요” 나는 짧은 골목처럼 좁은 공간을 천천히 걸었고 그들은 내 뒷모습을 보더니 “이제 뒤돌아서 오세요” 라고 지시했다. 마치 우리가 음주 운전을 한 것처럼 그런 식이었다. 그들의 시선엔 어느 정도의 의심과 가벼운 흥미가 뒤섞여 있었고 나는 그걸 정확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화낼 이유도 없었지만 괜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뭘 그렇게 수상했나 아니면 단지 외지인이라는 이유로 이 작은 검문이 그들의 일상에 필요했던 걸까 한참을 지켜본 뒤 그들은 여권을 돌려주며 짧게 말했다. “가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 중 한 명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정말 이게 당신 나이 맞습니까 생년월일하고 얼굴이 전혀 안 맞는데요” 우리는 순간 멈칫하다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웃음이 터져버렸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고 너무 진지하게 던졌기에 오히려 웃기기까지 했다.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고 뭔가가 의심스러워 남긴 말투조차 나중엔 추억처럼 오래 남았다. 그때의 웃음은 긴장을 녹였고 어쩌면 그들도 의도치 않게 우리의 하루에 한 조각의 유머를 얹어주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