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함께할 것 같았던
아빠는 장녀인 나에게 많은 기대를 가지며 살아왔다. 하지만 본인의 기대에 못 미쳐도 ‘뭐 어떠냐 괜찮아’ , ’오늘도 잘 놀고와‘ 라며 공부에 뜻이 없어 학교 다니기를 병적으로 싫어하던 나를 잘 타이르며 그렇게 졸업을 함께해 줬다. 지금 돌이켜보면 성인이 되어서도 말 안 듣는 딸이 얼마나 미워 보이셨을까.
우리 부녀는 살갑고 가까운 편이긴 했지만 대조적으로 무뚝뚝한 사이였다. 아빠와 나는 똑 닮은 성격 탓에 우리는 깊은 속얘기를 하려면 술기운이 필요했고 그마저도 침묵이 8할을 차지할 정도였다. 그래도 아빠의 적극적인 노력 덕분에 나도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빠를 이해하고 어떠한 마음의 문을 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아빠가 가족들을 위해 한 몸 희생하며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봐오면서 나 또한도 마음속 깊은 구석 어딘가에 아빠에 대한 믿음이 단단히 박혀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빠도 1남 3녀 중 맏아들로서 어릴 적부터 기대를 많이 받았던 탓에 할머니, 할아버지의 지원을 혼자만 받기도 해서 여동생들의 질투, 특히나 둘째 고모의 시기를 많이 받아 성인이 된 후에도 사이가 많이 좋지 않음을 나 스스로도 자라면서 직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성격 좋고 운동 좋아하고 술 잘 마시고 분위기에 잘 어우러지는 아빠였기에 사람들이 그런 아빠를 가만두지 않았다. 해서 집에 새벽까지 안 들어오는 날이 많았고, 엄마와의 갈등도 깊어왔었다. 사이가 안 좋아지고 자꾸만 싸우는 부모님을 보며 어렸을 적에 남동생과 같이 울고 달래주며 원망하는 때도 있었다. 집에서는 엄마의 아빠를 향한 애증의 험담을 나랑 동생은 늘 들어왔고, 성인이 되어가며 가족들과의 시간도 거의 보내주지 않는 아빠에게 나 또한 엄마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울고 웃으며 지지고 볶는 세월 속 고등학교 3학년을 바라보던 해에 언젠가 엄마가 조용히 나에게 와서 아빠의 건강검진 사실을 알려줬다.
“너희 아빠가 건강검진 결과를 받았는데 위암 2기란다 “
그 말을 듣고서는 정말 황당한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봤던 것 같다. 그렇게 건강한 사람이 왜?라는 의문이 들어도 아빠는 잘 이겨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이후로 아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무 내색 없이 병원진료를 받으며 3년 만에 완치판정을 받았다. 우리 가족은 그 시점을 계기로 더욱 돈독해졌고 암흑 같은 동굴에서 빛줄기를 찾아 마침내 빠져나온 사람들처럼 그동안의 어둠은 잊은 채로 각자의 자리에서 도약하고 도전하며 살아내고 있었다.
아빠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던 사업을 접고 필연의 도움으로 직장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공을 세우며 승승장구하고 있던 무렵에 아빠는 재발한 위암을 마주했다. 이번에도 덤덤한 듯 보였지만 내 눈에는 달라 보였다. 그냥 느낌이 달랐다. 항암을 위해 일은 쉬고 있는 채로 적잖게 놀란 가족들을 달래주기라도 하듯이 대학병원을 홀로 왔다 갔다 하며 암환자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아빠는 그런 과정이 일상이라도 된 듯 살았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재발한 암을 마주한 2021년 겨울을 지나 암병동으로 입원을 한 후 나와 동생은 번갈아 3개월 동안 아빠 곁을 지키며 낯설게 느껴지는 보호자역할을 했다. 이따금씩 아빠 심부름을 하러 병실을 나서면 따뜻하지만 서늘한 병원냄새가 가득했고 어린아이부터 어르신들까지 모두가 힘겨운 밤들을 보내고 있었다. 정말 아픈 사람도 너무 많고 나날이 안 좋아지는 아빠를 보고 있자니 마음에서 항상 쓴 물이 올라와 나를 괴롭혔다.
그날은 내가 아빠 곁을 지키는 날이었다. 엄마와 교대하는 시간이 다가온 그때 말하기도 버거워했던 상태의 아빠는 별안간 나를 보며 “힘내”라는 한마디를 끝으로 더 이상 어떤 말도 어떤 의식도 정상적으로 할 수 없게 됐다. 난 그 말을 듣고 엄마와 교대를 한 뒤 병실을 나와 복도구석에서 숨죽여 울었다.
그렇게 2022년 4월에 있던 부모님의 결혼기념일도 소리소문 없이 지나가고 5월을 맞이했을 때 아빠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고 의사 선생님은 ‘이제 준비하셔야 합니다 ‘라고 정말 드라마처럼 덤덤하게 얘기하셨다. 매일밤을 간절하게 기도했지만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인지 희망은 보이지 않았고 이제는 가족들도 못 알아보고 숨 쉬는 것도 눈을 뜨는 것조차도 힘겨워하는 아빠를 지켜보며 우리는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도 눈물이 많았고 특히나 부모님에게 호되게 혼났을 때 원망과 자책과 미안함이 섞인 눈물을 자주 보였다. 엄마랑 남동생은 평소에도 눈물을 보인적이 잘 없었지만 아빠를 케어하는 몇 개월 동안에 우리는 이상하리만큼 슬픈 기색 없이 이성이 온몸을 지배하기라도 한 듯 일도 하고 아빠도 케어하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심장이 더 이상 뛰지 않아 서서히 굳어가는 아빠를 보았을 때 우리는 그동안의 참았던 눈물을 토해내듯이 식어가는 아빠를 껴안고 울며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한 채 병실에 한동안 서있었다.
그 뒤로 시간은 속절없이 잘만 흘러갔고 올해만 벌써 3주기를 지냈다. 지금도 아빠의 ‘힘내’라는 말은 마음속을 일렁인다. 정작 힘을 내고 싶은 사람은 본인이었을 텐데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 힘을 더해서 내준 소리였기에 마음속에 굳건하게 자리 잡혀있는 말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인생을 살고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오기도 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우리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살기 위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세상이 만들고 가둬버린 틀 안에서 그치지 않고 자율성을 가지며 모두가 살기 위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서로서로 주고받는 사랑과 관심이 적당한 선을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각자의 공동체로써 힘을 발하지 않을까. 그러니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진정한 삶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