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사랑에 대한 탐구. 2

다정함.

by 지안


그날은 서러운 날이었다. 전날 친정 엄마가 아기를 데려갔다. 혼자 집에서 아침부터 그냥 울었다. 그냥 그런 날이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어릴 적 아빠한테서 받은 다정함이 그리웠다. 사실 내 기억의 순간은 한 손에 꼽히다 말 몇 순간일 뿐이다. 일부만이라도 다정했던 아빠의 사랑이 안전했다고, 만족스러웠다고 여기며 서러울 때면 과거의 그날, 그 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겪어내는 것은 다른 문제다. 아빠가 일찍 돌아가시지 않고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계셨더라면 안전하고 만족스러운 푸른 백색왜성의 사랑으로 기억할 수 있을까? 되려 여러 경험과 사건은 푸른 나의 별을 붉고 검게 만들어 냈을지 모른다. 나는 되려 겪어낼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서 안도의 한숨 아래로 나의 환상 속으로 기억을 가두기로 했다.

이는 나의 도피처가 되었다. 참담하게 만든 현실 앞에서 무너져 내릴 때마다 몸을 피했다. 그날이 그랬다. 숨기로 했다. 헤쳐나갈 수 있는 대범함의 무기를 버리고 싶었다. 세상은 내게 다정하지 않다고 결론짓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나, 그래도. 그런 나에게 지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심연으로 끌어당기는 우울에게 나를 내어주고 싶지 않아서, 나는 이젠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어서. 누군가는 미쳤다고 할지 모르는 상황에 용기를 냈던 것이었다. 경험으로 나를 내던졌다. 사랑은 있다고. 다정은 있다고. 증명해보고 싶던 충동적이었고, 무모한, 어쩌면 그렇게 엉망이던 객기의 날. 나는 다정한 사람을 만났다.


그와는 시시콜콜한 얘기들이 즐거웠다. 나의 뜬구름 잡는 목표들을 멋있다고 해주었다. 그는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에 집중해 줬다. 사소한 얘기일지라도.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지만 자꾸 빠져들고 말았던 눈동자가 각인될 정도로 대화에 강하게 집중하던 그 눈은 처음 겪는 다정이었다. 그의 목에는 응원의 말들, 위로의 말들, 지지의 말들이 가득했다.


그도 나와 같은 상처가 있는 사람이었다. 짧은 설명만으로도 그 말의 깊이를 모두 알아챌 수 있었다. 솔직했고 용감했다. 그는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을 하기 위한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빛과 같던 용기는 엉망이던 내게 용기를 주었다. 그의 유머 뒤에 숨은 깊은 생각들, 다정함 뒤에 숨은 겪어온 아픔들, 세심함 뒤에 숨은 남 모를 노력들 이런 것들이 느껴졌다.


그는 시장을 좋아한다고 했다. 우리는 같은 시장의 같은 김밥집을 좋아하고 있었다. 내가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는 그가 소설을 읽는 이유였다. 어부 시인을 알려줬다. 낙화는 내가 좋아하는 시가 되었다. 수영을 좋아하며 러닝도 좋아한다고 했다. 그의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했다. 나와 같았다.


그는 낭만을 좋아했다. 그러나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남을 배려하고 아끼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아픔을 통해 남에게 아픔 주지 않는 법을 배운 사람이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 대신 나서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와 같고도, 나보다 나은 사람이었다.


그와의 하루. 말라서 갈라졌던 땅에 홀씨와 물을 뿌려줬다. 그 희망이면 되었다. 동반적 사랑을 찾기 위한 나의 물음 앞에 희망이 아직 싹트진 않았지만, 씨는 심겼다.


이전까지 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을 만나야 되는지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었다. 나의 짧은 인생의 경험과 남들의 정답으로 내 인생의 갈피를 잡고 싶지 않았던 한날의 치기였다. (남들의 얘기를 귀담아 잘 듣고 정리했어야 했는데)


그날, 나는 동반적 사랑을 갈라낼 나만의 몇 가지 항목들을 알았다. 다정함. 다정함은 우울을 살려냈다. 나는 다정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나도 다정한 사람이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공통분모. 공통점이 많으니까 신뢰가 갔다. 물론 100프로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마음을 기대도 될 사람인 것 같다.라는 정도의 신뢰가 생겼다. 공통점이란 건 신비로웠다. 마지막으로, 나보다 나은 사람. 보통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는 것 같다. 나보다 나은 것 같다는 기준은 상당히 주관적이지만, 내 기준에서 그가 성숙해 보였다. 믿음직스러웠고 든든해 보였다.


역시 사랑은 경험이었다. 잡지 못하겠던 갈피가 비교적 뚜렷하게 잡혔다. 그와는 하루의 만남뿐이었다. 그러나 그 하루가 지금도 생생하도록 다정하고 따뜻한 추억이 되었다. 사랑을 탐구하기 위한 모험, 꽤나 달큼 씁쓸하다.






- 3편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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