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ter가 세상을 사랑하는 법>
어린 시절 나는 조용하고 혼자서도 잘 노는 아이였다.
책상 밑에 들어가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4-5시간도 거뜬히 놀곤 하였다. 엄마는 그런 나를 딸 같이 키웠다. 덕분에 애교도 많고, 사랑받을 줄 알고, 줄 줄 아는 아이가 되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나의 성격은 조금 변하게 되었다. 신체가 조금씩 발달하며, 남성호르몬이 분비되기 시작하였다. 뛰어놀며 공놀이를 하는 것에 매료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축구가 하고 싶었고, 학교 수업이 끝난 이후에도 혼자 운동장에 남아 공놀이를 하였다. 얼굴은 까맣게 탔고, 덕분에 어느 정도의 남성성을 가졌다.
운동을 잘하는 것은 학교에서 인기를 얻기에 충분한 장점이었다. 남자 친구들은 자연스레 나를 따랐고, 친구들과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하고 뛰어노는 것만큼 재밌는 건 없었다. 그때쯤 우리나라가 2002 월드컵에서 4강에 갔기 때문에, 박지성 같은 축구선수가 되기를 꿈꿨다.
불행히도 나의 아버지는 축구선수 출신이셨다. '불행히'라는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운동선수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 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아버지는, 나의 축구 사랑을 무척이나 못마땅해하셨다. 중학교 입학 전, 큰 결심을 가지고 아버지께 축구에 대한 꿈을 말씀드렸지만, 처참하게 거절당했다. 아버지는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알아들을 것이라고, 길게 나를 설득하시지도 않았다.
반항을 할 정도의 대담함도 없었기에, 평범하게 중학교에 진학했다. 축구가 더 이상 꿈이 아닌, 취미가 되었지만 여전히 재미는 있었다. 그때부터 공부와 성적이 좋은 학생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공부에 매진하게 되었다. 미친 듯이 공부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생각보다 성적이 잘 나왔다. 처음 봤던 시험이 전교 14등. 나는 그렇게 꾸준히 반에서 1-2등을 유지했고, 전교에서도 10등 안팎을 유지했다. 선생님들의 예쁨을 받았고, 친구 부모님들도 나를 좋아했다. 학교에서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아이가 되었다. 그런 시선들이 나를 우쭐하게 했다.
그 시절 나의 꿈은 검사였다. 공부가 크게 어렵다고 느끼지 않았고,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우월주의가 생겨, 나쁜 사람들을 심판하는 정의로운 검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보다는 명예로운 어른. 그때 당시, 범죄 관련 영화를 많이 봤던 것 같다. 주위에서 나를 잘났다고 칭찬해 주니, 이 사회의 배트맨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나 보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내 계획은 다 틀어지고 말았다. 공부를 잘하던 친형은 이과 출신이었고, 문과에 가면 대학을 가기 어렵다, 취직하기 어렵다는 말로 나를 이과로 진학하게 했다. 이과로 진학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검사에 대한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꿈은 사라지고,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리자, 방황의 시간이 찾아왔다.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친구들과 놀고 싶었고, 방황하고 싶었다. 그렇게 늦바람이 시작되자, 걷잡을 수 없이 추락했다. 꿈을 잃어버린 이에게 어떠한 자비도 없었다. 그렇게 추락하는지도 모르고 떨어져 보니, 절벽의 끝은 너무나 높았다.
그렇게 대학생이 되었다. 공부를 안 했다고 하기엔 그래도 괜찮은 학교에 진학하였다. 인서울의 명문대학교. 공부한 것에 비해 엄청나게 좋은 학교를 입학했지만, 꿈이 없는 사람에게 만족이란 없었다.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은 엄청난 불행이었다. 동기부여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점수에 맞는 학교, 점수에 맞는 과에 진학하여 졸업을 위한 학교생활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성실함이란 있을 수 없었고, 끈기란 것은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군대를 전환점으로 나아지기를 바랐지만, 복학생의 패기 또한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유학이라는 도피를 결정했다. 도피라기보다는 도전이었지만, '꿈'이라는 관점에서는 도피였다. 전혀 다른 장소에서 혼자 살면서 많은 경험을 했고, 삶에 대해 되돌아보는 소중하고 값진 시간이었다. 문제는 한국에 돌아와서 또다시 내 꿈이 아닌, 현실적인, 가족의 선택을 따랐다. 어머니, 아버지는 내가 공무원이 되길 원하셨고, 꿈이 없던 나는 다시 그 의미 없는 길을 택했다.
꿈과 의지가 없는 나는 성실할 수가 없었다. 단지 공부에 소질이 있었다는 이유로, 공무원 시험을 얕잡아 봤다. 그렇게 의미 없는 시간을 지내다 보니, 자존감이 낮아지고 결국은 합리화의 연속으로 괴로움을 피했다. 무기력감과 우울감의 언저리에서 다른 도전을 택했다. 전혀 다른 분야를 도전해 보는 것.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들을 한 명 한 명 만나 상담을 했다. 어떻게 그 일을 하게 됐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만족도는 어떤 지.
무언가에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생각한다는 것은 나를 변화하게끔 했다. 그렇게 마케팅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고, 처음 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돈을 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떨어진 자존감이 어느 정도는 회복되었다. 그 과정에서 꿈이 생기기도 하였다.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보는 것.
업계에서 일을 하다 보면, 창업과 스타트업이 얼마나 힘든 지 더 잘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브랜딩을 하고 싶었던 것은, 나름 더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회사를 위한 브랜딩이 아닌, 내가 만든 브랜드를 위해 일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대단한 브랜드를 만든다기보다, 꾸준히 할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다. 목공과 가구를 좋아했던 터라, 가구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다. 목공 일을 배우고, 마음에 맞는 디자이너와 함께 브랜딩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함께 하고 싶었다. 그렇게 막연하게 꿨던 꿈을 실현할 용기는 쉽사리 생기지 않았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며, 꿈을 꾸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음의 불안과 우울은 삶을 하루하루 그저 살아내는 것도 버겁게 만들었다. 단지, 삶이 재미없고 우울하다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해졌다. 왜 씻어야 되는지, 왜 먹어야 하는지 이유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알기 싫어졌을 때. 그냥 무너진 시간을 혼자 버텨냈다. 관계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나 자신을 돌보기 위한 처참한 시간이었다.
불안, 우울, 외로움과 싸우며 나름 파훼법을 찾았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약을 먹어야 한다는 것. 잠을 자기 시작하니, 어느 정도의 체력이 생겼고, 체력이 생기니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불안한 마음이 조금씩 안정이 되자, 주변에 털어놓을 힘이 생겼다. 털어놓는 것이 전혀 위로가 되지는 않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아짐이었다.
그러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붕괴되어 길을 잃은 동안, 마음에 쌓인 응어리들. 쓰레기 같은 마음들. 비루한 삶에 대한 염환. 염세. 그 모든 것들이 고이고 썩어 지독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글을 통해 배설하는 행위가 마음에 들었다. 배설할수록, 머릿속의 생각들은 더 많아지고 복잡해졌지만, 적어도 내 안의 악취는 조금씩 개선되었다.
그러다 조금의 빛을 보았다. 나의 지독한 염세적인 생각과 따뜻함을 갈망하는 애원을 좋아해 주는 이가 있었다. 이제야 진정으로 마주한 나를, 갉아먹고 배출하는 행위를 담백하게 느껴주는 이들이 있었다. 나의 글을 기다리고, 공감해 준다. 내가 '글재주가 있나?' 하는 생각보다는, 나의 가시 돋친 언어를 공감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내게 힘을 주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쓰다 보니, 수많은 글들이 쌓였다. 브런치 작가가 되고, 출간을 앞두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질리지 않고 지치지 않고 재미를 느끼며, 능동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멋지고 대단한 글을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그저, 지금처럼 하루하루 내 생각들을 정제된 단어로 배출하고, 예쁜 마음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내가 쓴 글, 단어 하나로 누군가가 내 생각을 공감하고,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정도면 된다.
그래서 지금 내 꿈은,
그냥 부디 글 쓰는 것을 지치지 않고 꾸준히 해낼 수 있기를.
그 글 안에서 나를 찾고, 조금 더 예쁜 마음을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그러다 결국엔 나 스스로 정말 마음에 드는 책을 한 권 쓸 수 있기를.
죽기 전에 내가 쓴 그 책, 그 글을 사랑하며 삶을 추억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