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사유

by 한 나강

이혼사유


왜 이혼했어요?

TV를 없애고 싶어서요




TV


좀 꺼져줄래

나도 좀 켜지게



*** 이어지는 글은 장난치다 나온 <장난치다 에세이>입니다.




이번에 이사준비를 하며 가장 크게 부딪혔던 부분이 집에 TV를 두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였다. 남편은 이명을 핑계로 댔지만 내가 납득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적당한 소음이 이명 증상을 완화시켜 주긴 하나 TV를 대체할 다른 소음 거리들이 이미 많이 있어서다. 굳이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모두가 안다. 우리는 언제든 온갖 전자기기의 소음에 파묻힐 수 있는 풍족한(?) 환경에 살고 있다. 고로 나 역시 이명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그의 입장을 고려해 내린 결정이었다.


한편으론 남편이 TV에 집착하는 짜 이유에 대해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하루의 반을 회사에서 보내고 두 시간을 출퇴근으로 길에서 소비하고는 남은 열 시간 중 또 반 이상을 자는 데 써야 하는 평범한 사십 대 직장인으로서 가 지고 집에 돌아와 단순히 생각을 비울 수 있는 도구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걸 TV멍이라고 해야 할까 보다. 또는 주말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영화를 보며 저녁을 먹곤 했는데, '가족이 함께 한다는 느낌' 같은 것들이 그로 하여금 TV의 부재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것도 아니라면 아마 나와 같은 이유일 도 있겠다.


십여 년 전 같은 일을 시도했다가 그에게 단칼에 거절당한 적이 있었다. 그때 들었던 말이 비수처럼 꽂혔는데, "그것 좀 안 보면 되지 그걸 못 참느냐!"는 그의 호통이었다. 다시 돌이켜 보아도 맞는 말이긴 하다. 다만 당시엔 아이와 함께 집에 있는 시간이 길었던 탓에 '집'이란 공간은 내 인생에 있어 거의 유일한 배경이었다. 그 배경의 한가운데 커다란 TV가 걸려있었고, 결국 거실을 넘어 내 삶의 중심에 저 시꺼먼 고철 덩어리가 떡하니 자리했다.


달달한 간식을 잔뜩 사다 두고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 심정과도 같이 손가락만 까딱하면 펼쳐질 극락을 뒤로할 능력은 내게 없었다. 저 네모난 것 안에는 무수한 잡생각들을 단숨에 씹어 삼켜줄 포식자들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TV를 끊기 위해서는 실로 어마어마한 의지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그런 것들이 싫었다. 아이가 불러도 못 듣고 한 곳으로 빨려 들어간 정신머리나, 앙증맞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그림에 짧고 과장된 감탄사로만 관심을 표하고 마는 무심함이나, 연예인들의 우스꽝스러운 말에 어떻게든 웃으려 혈안이 되어있는 나의 숨겨진 우울이나, 현실에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를 감동을 두 시간짜리에 욱여넣은 걸 울며불며 보고 있는 모순이 말이다.


예전에 알던 누군가가 말했었다. TV는 남들이 돈 버는 걸 지켜보는 거라고. 실상은 이랬다. 나는 삶에서의 소소한 격조차 찾지 못해 우울해했다. 그 때문에 남들이 만들어 놓은 그럴듯한 환희와 여운을 탐했다. 주 잠시 훌훌 털어낸 척할 수 있었던 그 행위는 진정한 나이길 원치 않는 자아의 발악이며, 꼭 내가 살아낸 것 같은 한 캐릭터의 감명 깊은 행로는 평생을 실제로 걸어보지 못할 낙담의 길이기도 하다. 한 자리에 망부석처럼 앉아 내내 기다리는 그것들은 원래부터 내가 가진 것들이요, 스스로가 찾으려 한 적이 없어 화석처럼 굳어버린 유물이다.


어린 시절엔 정말 TV밖에 없었다.기선 집에 없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고, 간지럼을 태워주거나 숨바꼭질을 대신해 줄 이들이 여럿 있어 주었다. 다만 의아한 것은 늘 TV앞에 앉아 등 뒤의 귀신을 무서워하던 소녀가 어른이 되어서는 그 자신이 더 무서워 피해 다닌다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것 같은 스스로가, 아무리 봐도 별 볼 일 없는 나의 삶이, 쳐나는 욕심에 비해 저들보다 한참 모자란 환경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는 이것이라고 선언해야 하는 진실이 나는 귀신보다 더 두렵다.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을 담은 저 검은 물체는 지금 이 순간 활어처럼 날아든 생에 미끼를 물린다. 물밖으로 건져 올려진 못난 아귀 같은 나의 삶은 순식간에 맨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해체되어 본래의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없다. 산해진미라며 온갖 양념을 떡칠해 혀를 유혹할 때쯤엔 비린내 나고 못생긴 진짜가 더는 필요치 않다.


미완숙과 결을 수용하려면 넉넉한 인심과 밝은 정신세계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요망한 생각 때문에 더욱 실제의 삶을 느끼기를 거부한다. 실은 알고 있는 바와 달리 미완숙과 결점은 연습을 통해서만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키워진다. 나와 내 삶을 사랑하는 것은 마술도 요술도 깨달음도 아닌 체득된 기술일 따름이다.


간식을 끊는 것을 두고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 첫걸음이라 말하듯, 달하고 자극적인 일상을 끊어내는 습관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자꾸 마주칠 수밖에 없는 배경을 제공하는 것이 그 시작점이다. TV 말고도 스스로를 잊게 할 발명품들은 쌔고 쌨지만, 진짜의 나를 덮어두는 일의 중심에 TV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가끔씩 멍을 때리는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인생의 반을 멍만 때리다 갈까 봐 두려워서 하는 말이다. 밉든 곱든 끌고 나아가야 할 존재다. 당장은 코미디보다 지루하고, 멜로보다 밍밍하며, 성장드라마보다 지지부진하더라도 마음에도 안 드는 배경과 인물과 사건들을 고스란히 내 것으로 살아내는 걸 연마하는 일이다. 그 때문에 보다 선명해진 감정들의 실루엣이 옛날의 그 귀신보다 더욱더 나를 공포에 떨게 할지도 모르니, 어떤 면에서는 담력을 키우는 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런 일로 이혼까지 결심한 건 아니었다. 단지 내가 원하는 환경을 얻으려면 저 팔다리 달린 인간을 먼저 내다 버려야겠구나 하는 난감한 심정으로 전투에 임했을 뿐이다. 그 끝에 TV로부터의 자유를 얻게 되었고, 이제는 밋밋한 일상에 셋 다 잘 적응하는 일만 남았다. 기껏해야 다른 소음을 만들어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게 될지언정 그것들의 대장 격인 TV를 밀어냄으로써 한 가지 보게 될 이득은 확실히 있다.


나보다 잘난 인간들의 총체인 그곳을 바라보며 지금의 삶을 얕보는 시간이 잠시나마 줄어들 거라는 것. 엄마를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가 대리만족의 쾌감이 끊겨버린 고통과 맞물리지 않으리라는 것. 그럼으로써 인생을 사랑하게 되리라는 보장 따위는 못하지만 적어도 사랑하는 척은 할 수 없게 되리라는 암담한 현실 같은 것들. 이런 것들로 뭐 대단한 걸 얻겠냐마는 조금이나마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기를 기대할 뿐이다.


남이 돈 버는 걸 지켜보는 삶이 아니라 긋지긋하고 무료한 일상에 발을 디디는 삶을 꿈꿔본다.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스마트폰에 깔아 두었던 SNS와 OTT 어플도 꼭 필요한 하나만 남겨두고 모두 삭제했다. 조만간 반은 절간에 들어앉은 듯 심심한 생활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부디 걸음아 나 살려라 환속하지 않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