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나서 그렇지, 애들은 착해
내 발꿈치는
갑옷을 입은 거야
벗기려 하지 마
살아야 하니까
*** 이어지는 글은 장난치다 나온 <장난치다 에세이>입니다.
갓 대학을 졸업했던 그 시절 나에게 있어 구두란 아주 특별한 날 신데렐라처럼 잠깐 구겨 넣던 하나의 소품에 불과했다. 그러다 한 일 년 즈음 모 회사의 안내원으로 근무하게 되면서 매일 출근용으로 구두를 신게 되었다. 그때부터 무서운 속도로 발꿈치에 각질을 쌓아가기 시작했고, 막 일 년이 지났을 무렵엔 딱딱한 구두 위에서도 거뜬히 버틸 만큼 두터운 굳은살을 장착하게 되었다. 덕분에 3센티를 넘어 7센티나 되는 것을 신고도 종일 돌아다닐 수 있는 능력을 획득했으며, 그만큼 나의 발꿈치는 그 키를 더해갔다.
어릴 땐 어른들이 목욕탕에서 왜 그리 발꿈치를 깎아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벌거벗은 채로 한 손에 현무암 같은 돌을 들고는 있는 힘껏 자기 살을 긁어댔다. 비슷한 나이대가 되어 몇 번쯤 같은 동작을 시도하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아마 그때 일 년간 구두를 신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생길 수밖에 없는 살더미였다. 제까짓 게 안 생기고 배기겠는가. 살면서 걷기를 얼마나 걷고 뛰기를 또 얼마나 뛰었는데, 어떻게 아이처럼 보드라운 맨살을 바라느냔 말이다.
이런저런 제품을 사다 관리할 수도 있겠지만 발꿈치를 벗길 시간만 되면 왜 그리 해야 할 일들이 생각나는 건지 모르겠다. 차일피일 미루다 일 년이 가고 또 몇 년이 훌쩍 지나가니, 현무암 같은 돌덩이는 화장실에 전시품처럼 놓여만 있다. 오늘도 물끄러미 그 돌을 바라보다 내 살을 벗겨낼지 말지를 잠시 고민했다.
굳이 왜......?
벗겨내도 다시 자라난다. 세포들의 입장에선 기껏 보호하려고 만들어놓은 굳은살을 깎고 또 깎는 이 이상한 행위를 이해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건강에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쌓인 게 아니라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발꿈치 입장에서도 유리하다. 일부러 괴롭히려는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애면글면 지어 입혀놓은 방어막을 자꾸 홀라당 까서 되돌려놓느냔 말이다. 아기 살 같은 포실한 발꿈치로 이 거친 황야를 어찌 지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 살을 갖고 싶은 이 내 마음은 또 어찌한단 말인가.
예전에 아는 이가 자기는 손발을 관리하지 않는 여자가 꼴 보기 싫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이 지금 내 손끝과 발꿈치 꼴을 본다면 어디선가 시꺼먼 안대를 끼고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실은 이놈의 것들을 정리할 여력이 없다. 핸드로션이랍시고 발라봤자 금방 손을 다시 적셔야 하고 가족들이 먹고 만지는 것들에 질퍽거리는 걸 묻히고 싶지도 않다. 여름이 되면 샌들은 신어야겠기에 가끔 바셀린 같은 걸 바르기도 하지만, 미끄덩거리는 게 싫어서라도 차라리 꽉 막힌 운동화를 신고 싶다.
말은 이렇게 했으나 그 뻐끔뻐끔한 돌덩이는 오늘도 버려지지 않았다. 맨들맨들한 살을 탐내는 마음을 버릴 수가 없다. 발꿈치는 발꿈치대로 방치되고, 욕구는 욕구대로 처리되지 못했다. 향후 내 발꿈치의 향방이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과연 밀 것인가 말 것인가.
밀든 말든 하나는 정리하고 가야겠다.
지금 내 발꿈치가, 아는 이가 시꺼먼 안대라도 끼고 봐야 할 이 발꿈치가 과연 그렇게 볼품없고 더러운 것인지를. 게으름과 모자람의 상징인지를.
악어가죽같이 단단한 나의 발꿈치는 이 몸을 지키는 하나의 파수꾼이다. 파수꾼은 사십여 년간 변함없이 어느 한 사람을 받쳐주고 있는 스스로를 못내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오늘도 변함없이 지면으로부터의 온갖 자극과 예상치 못한 공격까지도 최전방에서 묵묵히 감당하는 중이다.
손은 또 어떤가. 점점 반지가 어울리지 않는 손매가 되어가는 것 역시 파수꾼의 자태라 할 만하다. 설령 이 모두가 세상이 정한 미(美)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그보다 더 높은 선(善)의 기준에는 닿고도 남는다.
애들은 착하다.